여리작의如理作意와 선우善友

선우善友 비구,
그는 들음이 있고 공경함이 있어
벗들의 말을 실천하나니,
알아차리는 자, 유념하는 자 되어
점차로 이루리,
일체결박의 진멸.

— «여시어경» 17경에서

이 경문은 소부경전 중 하나인 «여시어경如是語經» 17경의 게송이다. “여시어(itivuttaka)”란 “하신 말씀”이라는 뜻으로 세존께서 하신 짤막한 말씀들을 결집한 경인 까닭에 “여시어경”이라 하였다. «여시어경» 17경 전문과 이와 평행하는 16경 전문을 함께 소개한다.

* * *

실로 이것은 세존께서 하신 말씀, 아라한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나는 들었다.

“비구들이여, 아직 미진한 유학有學 비구가 위없는 유가안온瑜伽安穩을 바라며 머무를 때, 내적인 요소로서 달리 이보다 많은 이익이 되는 그 어떤 요소도 보지 못하였나니, 비구들이여, 그것은 바로 여리작의如理作意이니라. 비구들이여, 여리작의하는 자는 불선不善을 버리고 선善을 계발하느니라.”

이러한 뜻을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리작의如理作意,
유학有學 비구를 위한 법,
달리 이보다 많은 이익 없구나.
위없는 뜻에 도달하기 위하여
여리정근如理精勤하는 비구,
괴로움의 진멸 이루리.

Yoniso manasikāro
dhammo sekhassa bhikkhuno
natth-añño evaṃ bahūpakāro
uttamatthassa pattiyā
yoniso padahaṃ bhikkhu
khayaṃ dukkhassa pāpuṇe ti

이것을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셨다고 나는 들었다.

— «여시어경如是語經» 16경 전문

*

실로 이것은 세존께서 하신 말씀, 아라한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나는 들었다.

“비구들이여, 아직 미진한 유학 비구가 위없는 유가안온을 바라며 머무를 때, 외적인 요소로서 달리 이보다 많은 이익이 되는 그 어떤 요소도 보지 못하였나니, 비구들이여, 그것은 바로 선우善友이니라. 비구들이여, 선우 비구는 불선을 버리고 선을 계발하느니라.”

이러한 뜻을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선우善友 비구,
그는 들음이 있고 공경함이 있어
벗들의 말을 실천하나니,
알아차리는 자, 유념하는 자 되어
점차로 이루리,
일체결박의 진멸.

Kalyāṇamitto yo bhikkhu
sappatisso sagāravo
karaṃ mittānaṃ vacanaṃ
sampajāno patissato
pāpuṇe anupubbena
sabbasaṃyojanakkhayanti

이것을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셨다고 나는 들었다.

— «여시어경如是語經» 17경 전문

* * *

유가안온瑜伽安穩(yogakkhema)”은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마음이 일렁이지 않고) 요가에 머무름”이다. “유가瑜伽”는 “요가”의 한역어이다. 경전에서는 거의 대부분 “위없는 유가안온(anuttara yogakkhema)”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며, 이는 경전 여러 곳에서 “열반”과 동급의 의미로 통용된다. “유가안온”의 구체적인 의미는 상응부 35.104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눈에 의해 식별되어 바라고 원하고 좋아하고 사랑스럽고 욕심나고 탐나는 색色들이 있다. 여래에게 이것들은 제거된 것들, 근절된 것들, 속 빈 다라수 같은 것들, 존재하지 않는 것들,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법들이다. 여래는 이것들을 제거하도록 유가瑜伽를 일러 준 것이다. 그리하여 여래는 ‘유가안온자’라고 불린다.

— 상응부 35.104, “유가안온자경”에서

그리고 “여리작의如理作意(yoniso manasikāra)”는 경전에서 수없이 언급되는 용어인데도 이상하게도 이에 대한 구체적 정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경우는 고대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상적인 낱말이어서 따로 설명을 하지 않은 경우로 보고 싶다. 일상어인데도 경전의 언어로 전승된 까닭에 후대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난해하게 다룬 사례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 반대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경전의 언어를 쉽게 다루는 경향도 경계해야 한다.) 나는 “작의作意”를 “주의注意”, “유의留意” 정도로 새기고 싶으며, “yoniso(如理)”는 “yoni(자궁, 근원)”에서 파생한 낱말인 만큼 “근원적인”, “사리에 맞는”, “온당한”, “알맞은” 등의 뜻으로 새기고 싶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진인眞人을 가까이함이 이루어지면 정법 들음을 이루며, 정법 들음이 이루어지면 신심을 이루며, 신심이 이루어지면 사리에 맞는 주의(如理作意)를 이루며, 사리에 맞는 주의가 이루어지면 유념(사띠)과 알아차림을 이루며, 유념과 알아차림이 이루어지면 감관수호를 이루며, 감관수호가 이루어지면 세 선행을 이루며, 세 선행이 이루어지면 사념처를 이루며, 사념처가 이루어지면 칠각지를 이루며, 칠각지가 이루어지면 명明·해탈을 이룬다. 이와 같이 이 명·해탈의 자양분도 있으며 이와 같이 이룸도 있다.

이는 마치 비구들이여, 산꼭대기에 하늘에서 폭우가 내려 빗물이 흘러내림과 같으니, 빗물은 산과 협곡과 계곡의 개울을 이루며, 산과 협곡과 계곡의 개울이 이루어지면 작은 못을 이루며, 작은 못이 이루어지면 큰 못을 이루며, 큰 못이 이루어지면 천을 이루며, 천이 이루어지면 강을 이루며, 강이 이루어지면 대해·대양을 이룬다. 이와 같이 이 대해·대양의 자양분도 있으며 이와 같이 이룸도 있다.

바로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진인을 가까이함이 이루어지면 정법 들음을 이루며, 정법 들음이 이루어지면 신심을 이루며, 신심이 이루어지면 사리에 맞는 주의를 이루며, 사리에 맞는 주의가 이루어지면 유념과 알아차림을 이루며, 유념과 알아차림이 이루어지면 감관수호를 이루며, 감관수호가 이루어지면 세 선행을 이루며, 세 선행이 이루어지면 사념처를 이루며, 사념처가 이루어지면 칠각지를 이루며, 칠각지가 이루어지면 명·해탈을 이룬다. 이와 같이 이 명·해탈의 자양분도 있으며 이와 같이 이룸도 있다.

— 증지부 10.61, “무명경”에서

인용한 “무명경”에 따르면, “사리에 맞는 주의”는 “신심”의 성과(이룸)이자 “유념과 알아차림”의 자양분이 된다. 이 위치를 고려하면서 «여시어경» 16경 게송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사리에 맞는 주의注意,
유학有學 비구를 위한 법,
달리 이보다 많은 이익 없구나.
위없는 뜻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리에 맞게 힘쓰는 비구,
괴로움의 진멸 이루리.

Yoniso manasikāro
dhammo sekhassa bhikkhuno
natth-añño evaṃ bahūpakāro
uttamatthassa pattiyā
yoniso padahaṃ bhikkhu
khayaṃ dukkhassa pāpuṇe ti

여리작의如理作意와 선우善友”에 대한 2개의 댓글

  • 또 한해가 지나갑니다. 여리작의 할 수 있는 새로운 한해를 기대하며, 아기부처님과 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좋은 글 자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Bonne Année !!

    자등루
  • 이 한갓진 곳에 때마다 들러 반가운 인사 나눠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해가 가고 옴에 늘 청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벗의 말을 잘 듣고 공경하며 실천하는 자가 선우라 하였으니, 부처님의 말씀, 경전의 말씀, 벗들의 말씀 늘 마음에 담고 소중하게 살아가는 나날이 되기를 비나이다, 여기 들르시는 모든 분들께!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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