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경문은 초기불교 경전에서 고층(古層)에 속하는 「숫타니파타」의 “무소뿔 경”에 나온다. 「숫타니파타」는 교법의 체계가 확립되기 전 가르침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질박한 언어로 교법을 파해하는 힘을 분출하고 있다. 각 수행전통에서 비롯한 교법이 고착되고 경직된 이 시대에, 우주의 성좌처럼 빛나는 가르침을 온몸으로 마시는 시간은 귀하고 신선하다.

“무소뿔 경”은 한 명의 장부가 “흑단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듯” 재가생활의 증표를 버리고 출가자로서 나설 때 홀로 가야 할 명징하고 정결한 여정을 일러준다. 이 경을 읽어보면 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경책하지만, 다만 “훌륭하게 살아가는, 용맹한, 지혜로운 벗”을 만날 경우에는 그와 함께 길을 가라고 가르친다. 이 벗은 곧 스승이기도 하다. “지혜롭다(nipaka)”의 어원은 “스승(nipa)”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들의 벗”이라고 말한 사실을 상기하자면, 벗은 스승이며 스승은 벗이다.

그러나 “훌륭하게 살아가는, 용맹한, 지혜로운 벗”을 만나기란 쉽지 않는 법! “자신보다 뛰어나거나 동등한 벗”, 스승으로서의 벗을 만나지 못한다면, “마치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스승을 위시한 여러 도반들과 함께 수행할 경우 그 관계성으로 인하여 하나의 성이 건립된다. 이른바 ‘모임’, ‘조직’이라는 것이 탄생하고 그 ‘모임’, ‘조직’을 생존시키기 위한 섬세한 무형의 움직임들이 꿈틀거리며 도반들 간에 소통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물, 마치 한 나라와도 같다. 그러할진대, 함께 공부했던 도반들과 그 모임을 떠나서 혼자서 길을 간다는 것은 “마치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는 것”과도 같다. “물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불꽃이 타버린 재로 돌아가지 않듯이”, 이제까지 경험한 즐거움과 괴로움, 쾌와 불쾌를 벗어던지고, “평정과 고요와 청정”을 얻고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다.

너는 그렇게 홀로 갈 수 있겠느냐? 세간의 거대한 흐름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거슬러 공부하는 길을 택했고, 그 길 위에서 정녕 만나기 힘든 도반들과 스승을 만났는데, 그 벗들과 함께한 세월, 그 정겨운 세월, 너의 세월, 너의 인생, 너의 나라를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겠느냐? “무소뿔 경”은 혼자서 가라고 한다,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그렇다면 혼자서 가는 길, 과연 그 수많은 가르침 중에서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 것이냐? 누가 진짜 스승이며 누가 가짜 스승이냐?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지식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소문에 그렇다고 해서, 성전(聖典)에 전한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 원칙에 의한 것이라 해서, 그럴싸한 추리에 의한 것이라 해서, 곰곰이 궁리해낸 견해이기에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편견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능력 때문에,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스스로 ‘이들은 좋은 것이고, 이들은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이들은 지혜로운 이에 의해 칭찬받을 일이고, 이들이 행해져 그대로 가면 이롭고 안락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그대로 받아들여 살도록 하라.

— 「칼라마 경」에서

칼라마인들이 살고 있는 케사푸타에는 여러 존경받는 사문과 바라문이 방문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가르침만을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다른 가르침을 멸시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가르침이 진실이고 누구의 가르침이 거짓이냐? 이 혼란스러운 의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위와 같이 답했다. 늘 들어온 가르침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성전에 전한다고 해서,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스스로 점검할 것을 당부한다. 무엇을 기준으로 점검하느냐? 그 가르침을 실천했을 때 이로움과 안락을 주는 것이냐, 아니면 해로움과 괴로움을 주는 것이냐로 구분하는 것이다. 참으로 이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헌장이라고 할릴 만하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괴로움이 일어나면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을 알며, 괴로움이 사라지면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안다. 이것을 아는 데 무슨 유서있는 전통이나 스승의 권위가 필요한 게 아니다. 그저 스스로 관찰하고 경험하면 알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벗이 필요하고 스승이 필요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만이 필요한 것이다. 진정한 스승은 바로 자신이다. 구도의 길은 그 어떤 스승, 그 어떤 벗이 곁에 있다해도 결국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반문한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한 비구가 눈으로 사물을 보고서 마음속에 탐진치가 있으면 ‘내 마음속에 탐진치가 있구나.’ 라고 알고, 마음속에 탐진치가 없으면 ‘내 마음속에 탐친치가 없구나.’ 라고 안다.

비구들이여, 이런 것들이 믿음을 통해, 좋아함을 통해,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진리라 해서, 그럴싸한 추리를 통해, 곰곰이 궁리해낸 견해이기에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편견을 통해서, 경험되어야 할 것들이겠는가?

— 「상윳타 니카야」 육처편

이상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그분의 구도역정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분, 싯타르타는 히말라야 설봉이 새벽의 여명을 받으며 웅자하게 자태를 드러낼 즈음 출가의 길을 떠났고, 사문 고타마가 되었다. 이윽고 알라라 칼라마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사문 고타마는 알라라 칼라마와 동일한 경지에 이르렀고 함께 교단을 이끌자는 제안을 받는다. 최소 수백 명의 공부조직을 이끄는 역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문 고타마는 여전히 생사의 의문을 풀지 못했고 혼자서 길을 떠난다. 그리고 다른 스승 웃다카 라마풋타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그곳에서 그는 라마풋타조차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도달한다. 스승을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그러자 라마풋타는 그에게 수백 명의 교단을 이끌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사문 고타마는 여전히 생사의 의문을 풀지 못했고, 또 다시 “마치 왕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이 구도여정에서 우리는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의 안목과 자세를 눈여겨볼 줄 알아야 한다. 그분들은 이십대 후반의 젊은이가 자신들과 동등한, 아니 자신들보다 위의 경지를 체득하자 순순히 교단을 이끄는 자리를 내놓을 줄 알았던 노년의 현인들이었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직후, 최초로 법륜을 굴릴 인물로 두 스승을 지목한 것도 부처님이 그들을 그만큼 높이 평가했다는 얘기이다. 새삼 그 두 스승이 그립고 존경스럽다.

아마도 그 두 스승은 당대에 세력을 떨쳤던 육사외도보다 수승한 경지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문 고타마가 그토록 훌륭한 스승들마저 떠난 것은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의문을 그대로 덮어두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 이 경책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의문을 스승의 가르침으로 덮어버리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이기도 하다.

하여 우리의 구도여정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용맹하고 지혜로운 벗과 함께 가는 길, 다른 하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길:

훌륭하게 살아가는 용맹한 벗,
지혜로운 벗을 만나거든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알아차림 속에서 그와 함께 유행하라.

훌륭하게 살아가는 용맹한 벗,
지혜로운 벗을 만나지 못하거든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는 왕처럼
숲속의 코끼리처럼 혼자서 가라.

— 「법구경」 코끼리 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대한 2개의 댓글

  • 잘 읽고 새깁니다..

    훌륭하게 살아가는 용맹한 벗,
    지혜로운 벗을 만나거든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알아차림 속에서 그와 함께 유행하라.

    훌륭하게 살아가는 용맹한 벗,
    지혜로운 벗을 만나지 못하거든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는 왕처럼
    숲속의 코끼리처럼 혼자서 가라.
    — 「법구경」 코끼리 품

    이채훈
  • 형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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