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심미주의의 과장인가? — 토마스 만의 니체 에세이를 읽고

1947년 4월에 미국에서 영어로 강연하고 그해 7월에 취리히에서 독일어로 강연하고, 이듬해 독일에서 «우리의 경험으로 비추어 본 니체 철학»(Nietzsches Philosophie im Lichte unserer Erfahrung, Suhrkamp 1948)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토마스 만의 짧은 니체 에세이가 «쇼펜하우어·니체·프로이트»(원당희 역, 세창미디어 2009)의 일부 내용으로 실려 번역되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1889년 니체의 정신적 붕괴를 상기하며 “아, 여기 한 고귀한 정신적 인간이 파괴되었도다!” 하는 오필리아의 비탄의 소리를 입히는 토마스 만의 안목에 사뭇 기대가 되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럽다.


토마스의 만의 니체 에세이. 니체 철학을 심미주의의 과장으로 보고 있다.

“나는 니체가 파시즘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이 니체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122) 그는 니체 철학에 대한 파시즘적 해석에 대하여 분명한 반대를 표명하지만(당시에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니체 오독에서 벗어난 뛰어난 안목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근본적으로 니체 철학을 독일 낭만주의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토마스 만이 니체를 이해하는 주요 반경은 니체의 초기작들인 «비극의 탄생»이나 «반시대적 고찰»에서 펼친 사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니체의 혈통과 뿌리를 같이하는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120)라는 확언도 거기에서 비롯한다. 심지어는 “노발리스가 미적 위대성의 이상, 최고도의 야만성, 동물적 정신이라고 칭한 것, 바로 그것이 니체가 내세우는 초인”(121)이라고 보고 있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다.

바그너와 니체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작가이니만큼 니체 이해가 매우 남다를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탁월한 내용이 없는 단순한 이해 수준으로 평가하고 싶다. 하긴 하이데거나 들뢰즈 같은 천재적인 해석자들에 의하여 니체가 재발견되기 전까지 누군들 토마스 만 수준의 이해력을 넘어설 수 있었겠는가마는,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적어도 그는 20세기 최고의 독일작가로 손꼽히지 않던가? 작가라면 철학자들의 이론적 형해화에서 탈피하여 예민한 감각으로 남다르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토마스 만은 적어도 니체에 관해서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작가마저도 철학적·이론적 선이해로 오염되는 것이 독일적 근성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으려고 몇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만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사실 이 니체 에세이조차도 잘 안 읽힌다.)
 

물론 유미주의와 야만성의 근친성이라는가, 심미적 태도와 도덕적 태도의 대립, 악의 낭만화 등등을 거론하며 니체 철학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토마스 만의 입장은 그의 개인사를 빼놓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그가 파시즘의 위험을 몸소 경험한 작가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휴머니즘을 옹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토마스 만 만큼이나 도덕주의 내지 윤리적 이상을 높게 평가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세계 제2차 대전을 겪으면서 망명생활을 했던 작가나 예술가들이 “좀더 온화한 사상”, 휴머니즘, 도덕주의, 윤리적 이상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니체는 평생 동안 이른바 ‘이론적 인간’을 몹시도 저주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야말로 이 이론적 인간의 찬양자이자 순수문화에 뿌리박고 있는 인간 유형이다. 그의 사유는 절대적 천재성에 근거하여 지극히 비실용적이고, 교육적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근본적으로 비정치성을 띠고 있다.(133)

위의 인용문에 토마스 만의 니체 이해 수준이 잘 드러나 있다. 니체의 사유가 비실용적이고 무책임하다는 평가는 그의 개인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비정치성을 띠고 있다는 평가는 파시즘적 해석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 그리고 니체는 이론적 인간을 저주했으나 그 자신이야말로 이론적 인간의 찬양자라는 평가에서 토마스 만의 니체 이해가 의외로 초보적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이것은 토마스 만이 이론적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파시즘과 같은 어마어마한 사태를 겪은 이들은 낭만주의에 대한 공포, 이론적 인간에 대한 변호가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적인 경로가 아닐까? “우리의 경험으로 비추어 본 니체 철학”은 곧 “토마스 만의 경험으로 비추어 본 니체 철학”이기도 하다.

토마스 만은 니체 철학을 심미주의의 과장으로 보았으나, 니체 철학은 낭만주의도 아니며 심미주의도 아니다. 그러나 토마스 만은 그의 경험상 낭만주의·심미주의·야생성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고, 이론적 인간·도덕주의·계몽주의를 통해 위안을 얻었던 것같다. 이것이, 다름아닌 그의 삶이, 니체 철학을 이해하는 시선을 방해했을 것이다. 토마스 만은 “그는[니체는] 자신의 고독을 심미적 태도로 과장했다”(134)고 평가했으나, 이를 그대로 뒤집으면, 토마스 만은 자신의 두려움을 이론적 태도로 과장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의 고독을 과장하지 않았으며, 토마스 만도 자신의 두려움을 과장하지 않았다. 그의 고독과 그의 두려움이 바로 그들 각자의 생을 전체적으로 규정했으므로. 따라서 정직한 작가나 철학자들이 내놓은 작품과 사상은 자기 생을 지키기 위한 방어책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니체의 말대로, 심지어는 취향조차도 자기 방어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누굴 함부로 비난할 수 있겠는가.

니체는 심미주의의 과장인가? — 토마스 만의 니체 에세이를 읽고”에 대한 2개의 댓글

  •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는데 어찌나 어렵던지요… 책장을 덮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작가의 작품이 자기 생을 지키기 위한 방어라는 말씀 공감합니다. 어제는 섬진강 답사를 했는데 현선생님이랑 같이 했던 시간들이 많이 생각났어요.
    자고 일어나니 어제가 더욱 생생합니다. 비가 부슬거리는 돌담마을길이랑 버들가지랑 …. ‘여백, 여운’ 잊었던 말들이 기억처럼 떠오른 아침이었지요.

    강물
  • 선생님도 토마스 만 때문에 고생하셨군요. 잘 읽히지 않는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번역 문제도 한몫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독일어권 번역 책들이 참 읽기 힘들잖아요. 이해도 안되고 집중도 잘 안되고. 저같은 경우에는 한글 번역어에 상응하는 독일어를 떠올려야 비로소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요즘 들어서는 독일어의 답답한 문장 호흡을 그대로 따라서 번역한 책들을 읽을 때는 숨이 턱턱 막힐 지경입니다. 예전에 이런 책들을 어떻게 읽었나 싶기도 하고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독일문학 쪽 번역에도 문제가 아주 심각할 겁니다.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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