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귀한 사람이 먼 곳으로 떠났다” – 게르하르트 베어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읽고

이십대 시절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루가복음 10장 38절 한 구절에 대한 설교였는데, 에크하르트는 그 설교에서 라틴어 성서구절을 독일어로 직접 번역하여 소개한다. 라틴어 성서 원문과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번역문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예수께서 한 성읍으로 올라가시니 마르타라는 이름의 한 여인이 그분을 집에 영접했다(Intravit Jesus in quoddam castellum et mulier quaedam, Martha nomine, excepit illum in domun suam).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작은 성읍으로 올라가시니 부인인 한 처녀가 영접했다(Unser Herr Jesus Christus ging hinauf in ein Burgstädtchen und ward empfangen von einer Jungfrau, die ein Weib war).

“예수”를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옮긴 것이나 “성읍”을 “작은 성읍”으로 옮긴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여인”을 “부인인 처녀”로 옮긴 것은 원문을 자유롭게 첨삭한 것인지라 사실 용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번역했고, 이후의 설교 내용은 번역상의 문제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가령 “예수를 영접할 사람은 처녀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처녀가 되어야 한다”, “처녀는 부인이다, 처녀는 자유롭고 자아구속이 없어 구속되어 있지 않으며, 처녀는 하느님이며 언제나 동일하게 그 자신 가까이에 있다”, “하느님은 그 어떤 양태나 속성이 없는 순일무잡한 하나이므르, 이 의미에서 하느님은 아버지도 아니며 아들도 아니며 성령도 아니다.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그 어떤 것이다. 보라, 하느님은 순일무잡하시므로 그 하나 안으로, 내가 영혼 안의 작은 성이라고 부른 그 하나 안으로 들어오시며, 그외 어떤 방식으로도 들어오시지 않는다.” 등등, 그의 설교 내용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과연 이런 해석이 가능하기라도 한 것일까? 해석 가능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도대체 이런 말들은 무슨 의미인가? 에크하르트는 청중의 이런 의구심을 예상했다는 듯, “여러분이 제 마음을 가지고 인식하기라도 한다면 제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참이며, 진리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은 참이다. 이를 위해 저는 여러분들에게 진리를 증인으로 세우고, 제 영혼을 보증으로 세운다”라는 유의 말을 종종 곁들인다.
 

책을 매우 적게 소장하고 있는 나의 서재에 에크하르트 관련 책들이 꽤 있는 것도 아마 그때에 접한 에크하르트의 파격과 과격함이 내 영혼을 깊이 흔들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조금 성장하고서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다시 읽어보니, 그의 설교는 알레고리 해석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에크하르트는 성서의 텍스트 자체를 인간 영혼의 움직임을 묘파한 거대한 알레고리 텍스트로 보는 셈이다. 그래서 성서의 텍스트는 한껏 자유롭게 해석된다. 텍스트가 전면적으로 흔들리면서 전대미문의 심오한 해석이 탄생하게 된다. 뭘 모르던 시절엔 알레고리 해석만큼 주관적이고 억지스런 해석도 없다고 보았는데, 이제는 알레고리 해석만큼 경이로운 해석도 달리 없다. 다만 성서의 텍스트를 전면적으로 흔들 수 있을 정도의 깊은 안목이 있는 수준, 즉 에크하르트 정도의 수준에 이른 인물의 알레고리 해석일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오리게네스 수준의 알레고리 해석은 그에 비할 바 아니다.

내가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처음 접한 것은 독일 신비주의자들의 글들을 모아놓은 «Deutsche Mystik(독일 신비주의)»라는 독일책에서였다. 그 당시 국내에는 군소 출판사에서 나온 에크하르트의 설교집도 있었던 듯한데, 영어에서 중역한 것인데다가 번역도 신통치 않아 독일어로 읽었을 때의 그 충격을 맛보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스즈키 다이세츠의 «엑크하르트와 禪»(강영계 역)도 번역되어 있었지만, 에크하르트의 활력과 기세, 파격을 전혀 드러내지 못한 몹시 평이하고 지루한 서술에 불과했다. 십분 동의할 수 있는 길희성의 평가를 빌려 말하자면, “그의 엑카르트 이해는 극히 초보적이고 피상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거의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런데도 서양학자들에게 스즈키가 제법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은 그들의 선불교에 대한 이해 내지 신비주의에 대한 이해가 매우 초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파격과 과격, 심오함 탓인지 국내에서의 그에 대한 소개는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듯하다. 그러다가 혜성과 같이 등장한 것이 길희성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2003)이었다. 기독교와 불교를 함께 연구하는 저자의 이력상 에크하르트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다고 하겠는데, 의외로 그는 매우 늦게 에크하르트를 접한 듯하다. 언급한 책의 머리말에서 길희성의 한탄을 한 번 들어보자:

특히 동서양 사상의 대화, 그 가운데서도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두 위대한 종교 전통의 창조적 만남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엑카르트와의 만남은 실로 하느님의 “계시”라고 느껴질 정도로 감격적 경험이었다. 엑카르트의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나는 참된 인간성의 실현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 동양 사상과의 완벽한 일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공부한답시고 관심을 가진지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나는 엑카르트 사상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서양 중세철학을 소홀히 해 온 나의 무지를 후회하기 시작했다. 라틴어 공부도 좀 더 착실히 해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도 많이 했지만,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 너무 늦게 엑카르트라는 사상의 보고를 만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랬던 만큼 그는 에크하르트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듯하다. 그의 저작은 동서양 사상을 넘나들면서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소개한 뛰어난 학술서이다. 특히 에크하르트 사상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하나”, “초탈과 돌파”, “하느님 아들의 탄생”에 대한 심도 있는 소개가 눈에 띈다. 그러나 학자는 역시 학자이므로, 다른 학자들을 상대하느라 수많은 면수를 할애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가능한 한 많이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어 학자들의 해석이 가해지지 않은 에크하르트의 사상을 비교적 많이 접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에크하르트에 대한 연구서보다는 에크하르트 설교의 번역서를 원했다. 어찌 보면, 길희성의 저작은 에크하르트 저작의 번역서나 입문서가 없는 마당에 전문적인 연구서가 등장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가 올해 만난 책이 바로 게르하르트 베어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이부현 역, 안티쿠스 2009)였다. 단적으로 말해, 게르하르트 베어의 안목은 길희성의 안목과 깊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에 대한 입문서의 역할로는 이보다 적절한 것은 없을 듯싶다.

에크하르트
게르하르트 베어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입문서로 알맞다. 저자의 겸허한 접근자세가 좋다.

게르하르트 베어의 저작은 목차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에크하르트의 활동시기를 즈음한 독일 신비주의, 에크하르트의 생애를 먼저 서술하고, 에크하르트의 라틴어 저작들과 독일어 저작들, 그리고 설교들을 간략히 소개한다. 그리고 주제별로 에크하르트의 사상을 살핀 다음, 수용사와 영향사, 선불교와의 관련성 등을 서술한다. 적은 분량의 저작인데도 제법 알찬 느낌을 주는 것은, 저자가 자신의 관점을 과도하게 투영하지 않고 최대한 사상가들과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신비주의 문헌을 앞에 두고 갑론을박하는 것만큼 공허한 일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경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토론과 논쟁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야콥 뵈메의 연구자인 에른스트 벤츠는 신비주의 사상을 연구하는 비평가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 영역과 직관 영역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은 압축되어 있는 총보總譜와 같이 신비주의의 문헌적 증언들을 서로 대립시켜 정렬시킨다. 그들은 이러한 총보에서 단지 개별적인 음색만 힘겹게 해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총보의 건축과 오케스트라 연주는 그들의 파악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 있다. 신비주의로 향하는 논의의 단조로움과 궁색함은 신비주의적 경험에 대한 어떠한 감각도 아예 없는 사람들이 여기서 떠들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222-223)

지당한 말이다. 신비주의적 경험이 없는 한 학자들은 총보를 파악할 능력이 없다. 그런데도 그 총보에 대해 떠들어야 한다는 것은 무모한 시도이자 모험이다. 그러므로 신비주의 사상을 다루는 학자들은 첫째도 둘째도 불손하지 않아야 한다. 융의 표현을 빌면, 형이상학적 언명을 포기하고 “학문적인 자기 겸손Wissenschaftliche Selbstbescheidung”이 필요한 것이다. 가령, 게르하르트 베어의 자세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는데, 에크하르트 앞에서 최대한 물러서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도 헛다리를 짚는 대목이 제법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옥석을 가리지 못하고 여러 사상가나 학자들을 두루 평등하게 소개하는 것은 경험에서 비롯한 안목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르하르트 베어의 저작은, 역사적 사상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입문 수준에서 소개하기로 유명한 로로로 시리즈에 속한 것이다. 그런 만큼 독특한 해석이나 주장은 없고 말 그대로 “입문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사상가의 사상이 탄생한 배경이나 전후 영향사에 관한 서술은 매우 유익하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원초적 그리스도교 그노시스의 유산 및 비밀 계율과 비의적인 실행 등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는”(23)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를 다시금 각인하게 되었으며, 쿠자누스가 20년 이상 에크하르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과 에밀 브루너의 «신비주의와 말씀»이 루돌프 오토의 «서양-동양의 신비주의»와 같은 연구서들에 대한 저항으로 기획되었다는 사실 등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베어의 저작에서 별도의 평가 없이 그저 병렬적으로 인용된 사상가들 중에서 칼 구스타프 융은 역시 남다른 사상가라는 생각, 한때 내가 심취한 바 있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사상은 근본에 있어서 수사에 불과한 철학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 바르트를 위시한 변증법적 신학은 개신교 특유의 합리적 정신이 낳은 산물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 그리고 에리히 프롬, 마르틴 부버, 스즈키 다이세츠 등은 사상가라 하기엔 함량 미달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 등을 겸사겸사 가져보게 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접근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영지주의 전통과 “부정의 길via negativa”로 유명한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타의 신비신학을 피해갈 수 없다. 즉, 기독교 전통을 위협하는 요소들과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 전통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위험한 시도이겠지만, 개신교 전통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위험도 되지 않는다. 사실 개신교 전통에서는 신비주의 전통이 사라졌다고 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종교개혁과 인문주의가 두 바퀴를 이루며 함께 굴러갔다는 어느 역사학자의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러한 여러 대립적 요소들을 단순화하여, “영지주의 전통과 기독교 전통 간의 대결” 운운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그건 개신교적 전통만을 아는 이들의 무지한 단순화에 불과하거나 기독교 교조주의자들의 편협한 단순화에 불과할 수 있다. 가톨릭 전통에서는 “신비적 합일”의 신비주의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가톨릭 신비주의의 극점에는 다름아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있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와 영지주의 간의 대결”이라는 언어 조합이 매우 이상할 수밖에 없는 것도 에크하르트의 신비사상과 영지주의의 전통 간에 친화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고착된 기독교 사상을 넘어서 더 폭넓게 바라보자면, 영지주의와 기독교 전통의 대결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고 그 대신에 신비주의와 합리주의의 대결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은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단죄했고, 에크하르트의 사상도 한때 이단으로 단죄받았다. 이 단죄의 역사 위에 성립한 기독교 역사는 영지주의나 에크하르트의 신비사상을 언제라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이것이 에크하르트에 대한 국내 소개를 더디게 만든 요소들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길희성의 연구 이후 에크하르트에 대한 국내 소개가 전무하다시피 했는데, 2009년 이부현의 등장과 함께 사정이 많이 달라질 듯하다. (그간에 매튜 폭스의 에크하르트 관련 서적도 번역되었지만 나는 저자의 역량에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어 그 책을 구입하지 않았다.) 역자 이부현의 저작들을 검색을 해보니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논고 번역서도 게르하르트 베어의 입문서와 함께 출판되었고 향후에는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설교도 번역될 예정인 듯하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논고»가 “독일어 설교와 논고 1”이라는 시리즈 제목을 달고 번역•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그 책을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기대가 된다.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설교와 논고의 번역이야말로 진정한 에크하르트의 소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르하르트 베어의 번역서로 판단해 보건대, 이부현은 번역어 선택에서 몇 가지 참신한 시도를 하고 있다. 가령 ‘버리고 떠나 있음Abgeschiedenheit’, ‘그냥 내맡겨두고 있음Gelassenheit’ 등으로 옮긴 것은, 길희성의 같은 용어에 대한 번역어 ‘초탈超脫’, ‘초연超然’과 비교해 볼 때, 자유로우면서도 이해가 쉽게 되는 편이다. 그의 번역문은 잘 읽히는 편이다. 독일어 특유의 만연체 문장 때문에 아주 간혹 가독성이 떨어지는 대목들이 눈에 띄지만, 그것마저 내게는 저자가 원문에 (특히 에크하르트의 인용문에) 가급적 충실했다는 증거로 읽힌다. 대부분 인명은 교회라틴어 발음으로 옮겨졌으며, 번역어 선택에 있어 가톨릭 전통에 충실하다.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논고와 설교는 중세독일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세독일어를 따로 연구하지 않는 이상 번역하기 힘들지만, 1963년에 출간된 요제프 퀸트Josef Quint의 뛰어나고 쉬운 현대독일어 번역본이 있어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에크하르트의 사상은 쉬운 독일어라한들 그 심오함 때문에 쉽게 번역될 일은 아니겠지만, 이제야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논고와 설교가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늦은 감이 없잖아 있다. 그런 만큼 나처럼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설교 번역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독자로서는 이부현의 등장이 반갑고 반갑다. 역자의 건강과 성실을 빈다.
 

에크하르트의 설교 형식의 논고 <고귀한 사람>은 루가복음 19장 18절의 “한 고귀한 사람이 한 왕국을 얻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되돌아왔다”는 성서구절에 관한 것이다. 루가복음 19장의 열 므나 비유에서 상황을 설정하는 별 의미 없는 건조한 서술문인데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는 이 구절을 특유의 알레고리 해석을 통해 더없이 심오하고 풍부하게 탈바꿈시킨다:

우리가 피조물들을 그들 고유의 본질 안에서 인식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저녁인식”이라 불린다. 그 인식으로 우리는 다양한 차별의 상像 속에서 피조물들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피조물들을 신 안에서 인식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아침인식”이라 불리며 하나의 “아침인식”이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우리는 온갖 차별 없이 피조물들을 관조하며, 하느님 자신인 하나 안에서 온갖 상을 탈락시키고 온갖 동일성을 벗겨낸다. 이것 역시 “고귀한 사람”이다, 주님께서 “한 고귀한 사람이 떠났다”라고 말씀하신 그 사람. 그는 하나이며, 하느님과 피조물을 하나 안에서 인식하기 때문에 고귀하다. […]

따라서 우리의 주님께서는 “한 고귀한 사람이 한 왕국을 얻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되돌아왔다”고 제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고귀한 인간은 제 자신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이를 자신 안에서 그리고 하나 안에서 추구하고 하나 안에서 맞아들여야 한다. 이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관조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되돌아왔다”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하고 있고 알고 있다는 점을 알고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

우리의 주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고귀한 영혼을 황무지에 보내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그 영혼의 마음 속에 말하리라.”(호세아 2, 14)

— Joseph Quint, Deutsche Predigten und Traktate, 7. Auflage, 146-149면

한 고귀한 사람, 에크하르트가 먼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되돌아왔다. 그의 설교는 떠났다가 되돌아온 위대한 신비가의 지극히 심오한 해석이다. “다양한 차별”은 무엇이며, “온갖 상을 탈락시키고 온갖 동일성을 벗겨낸다”는 것은 무엇이며, “하느님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우리는 에크하르트의 설교나 논고에서 이런 의문에 숱하게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혹은 수사법상의 논리로, 혹은 철학적 논변으로 파악될 수는 없는 것들이므로,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애써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다만, 한 고귀한 사람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그가 떠났다가 되돌아와서 설교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한때 이단으로 단죄되었으나 이제는 기독교 신비주의의 정수로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깊이 고마움을 표시하고 우러르면 될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아직 가야할 길, 아직 배워야 할 길이 멀다는 겸허한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언젠가는 에크하르트의 마음을 갖게 되어 그 말들을 이해할 날이 오게 될 것이므로.

“하나와 함께하는 하나, 하나의 하나, 하나 안의 하나, 하나 안에서 하나가 영원히. 아멘”(Quint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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