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건네고 화살을 맞을지라도 — 아잔타 벽화

와고라 강물은 아잔타 석굴사원을 둥글게 감싸고 흐르지 않는다. 강물은 조용히 내습하듯 한가운데를 깊이 치고들어와 활처럼 휘어서 흘러나간다. 석굴사원 문밖에 서면 강물은 저 멀리 고원을 아련히 흐르는 것이 아니요, 밑빠진 배 아래로 흐르는 강물처럼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깊이 들어오는 강물의 흐름으로 인하여, 단단한 석굴의 세계는 언젠가는 흘러가버릴 흐름처럼 여겨진다. 과연 흘러가지 않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비단 석굴뿐만 아니라 석굴의 조각도 벽화도 역사도, 사람의 시선도 감각도 생각도, 모두 흘러가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버릴 것도 없고 버리지 않을 것도 없다.

아잔타 석굴의 수행자들은 화려함으로 수행의 세계를 장식해버리고, 관능적인 몸으로 성스러움을 표현해버린다. 그리하여 그들이 세운 아잔타 석굴의 세계는, 마치 강물 위를 흐르는 무저선無低船 같다. 건널 수 없는 배로 불가사의하게 강물을 건너듯이, 일체의 것들을 자유롭게 빌리고 자유롭게 쓰고 자유롭게 버려서 이 세상을 건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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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제1굴, 마하자나카 본생담 벽화. 마하자나카 왕 앞에서 관능적인 춤사위와 음악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예술과 쾌락도 출가의 길을 막지는 못한다.

아잔타 벽화의 인물들은 성스럽고 관능적이고 아름답고 비루하고 화려하고 퇴폐적이다. 아잔타 벽화는 인간적인 언어와 삶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그대로 빌려 공간을 장식한다. 그 공간에서는 관능, 비루함, 퇴폐, 화려, 아름다움, 성스러움, 이런 언어들이 뿌리를 잃고 허공을 떠돈다. 현실적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해체되어 가상으로 돌아간다. 모든 개념과 사물이 안개처럼 흩어지면 거울처럼 맑은 내면이 드러나는 법이요, 맑은 내면이 드러나야 비로소 안개 속을 깊이 들어섰다가도 완벽하게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안개 — 그것은 아름다움이니 추함이니 성스러움이니 비루함이니 하는 모든 것들의 진정한 얼굴이다. 텅 비어 성스러울 것도 없고, 텅 비어 비루할 것도 없다.

이러한 정신적 세계를 대표하는 상징이 바로 연꽃이요 거위이다. 거위는 최상의 자유를 뜻한다. 물 위를 떠다닐 수 있으며 땅 위를 걸을 수 있으며 공중을 날 수도 있다. 그는 어디든 자유롭게 가고 언제든 자유롭게 떠난다. 마치 물 속에서 피되 물에 젖지 않는 연꽃처럼, 관능의 색채에 싸여 있되 관능의 색채에 물들지 않는 얼굴처럼, 거위는 석굴들의 천정, 세계의 천정을 유영하고 있다. 저 거위처럼, 끝없이 망망한 물결 위를 떠다니리라, 저 거위처럼, 끝없이 광활한 허공 위를 날으리라. 아잔타 석굴의 거위들은 그렇게 자유롭고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들 또한 자유롭다.

저 거위는, 저 우리는 강물을 흐르는 강물이다, 성스러울 것도 없고 비루할 것도 없고 아름다울 것도 없고 추할 것도 없는 강물. 강물은 강물을 건너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듯, 밑빠진 배라한들 부족할 것 없다. 놓아버려라, 평생토록 구축해온 가치판단들을,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가치들을 . . . 그 가치들은 더러운 것이고 성스러운 것이고 비루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은 가면이요, 이 세상을 건너는 동안 잠깐 빌려입는 옷가지에 불과할 뿐이다. 어찌 그 가면에 자신의 일생을 예속시켜 저 광활한 강물과 허공을 유영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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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제2굴 천정화. 거위는 연꽃과 더불어 유희하는 가운데 끝없이 광활한 물결, 원형의 물결 위를 천천히 떠다니며 유영하고 있다.

이렇듯 아잔타 수행자들의 삶은, 일반적인 가치로 볼 때, 불가사의한 내면을 갖고 있다. 그들은 집착 없이 성스러움을 그려내었고, 욕정 없이 관능을 그려내었고, 경멸 없이 비루함과 퇴폐를 그려낼 수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종교예술은 근원적으로 자유를 선사하는 예술, 하여 불멸의 예술이다. 대개 세속예술이 예술가 스스로의 욕망과 아름다움과 증오와 고통과 사랑과 열망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데 치중하지만, 종교예술은 그 모든 것을 빌려 그 모든 것을 해체시킨다. 위대한 종교예술의 뿌리에는 열망이나 성스러움이나 아름다움 따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밑빠진 배처럼 아무 것도 없다. 오직 강물이 흐르고 있을 뿐, 우리는 그 강물일 뿐.

그리하여 아잔타 벽화의 아름다움은, 꽃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같다. 가슴을 사무치게 쥐어잡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우수수 쓸어내어 가슴에 엉긴 것들을 풀어날린다. 응어리도 흩어버리고 영광도 흩어버리고 벽화를 대하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차가운 강물이 흐른다. 강물이 깊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 바람에 황금빛 낙엽이 활활 떨어지고 나목이 낱낱이 드러나는 시절로 무한히 회귀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것이 성스러움인지 아니면 아름다움인지 알 길 없으나, 뭔가 근원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안도감이 든다. 그리고 그 회귀의 여정을 사랑했던 이들의 생애와 흔적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더없이 경이롭고 한편으로는 위없는 위로가 된다.
 

부처님의 본생담. 아잔타 벽화의 서사는 대부분 본생담이 차지하고 있다. 정각자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기까지의 생애, 수많은 수많은 생애의 이야기이다. 평범한 한 사람의 내면조차도 수많은 이야기로 대체하지 못하는 법이니, 부처님같은 위대한 분의 내면이야 두 말할 나위 없겠다. 생사의 틈바구니에서 벌어지는 생애의 이야기도 끝이 없으니, 생사의 강을 건너신 분의 이야기는 더욱 끝이 없어라. 그래서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이야기는 되풀이되고 변주되고 그려지고 조각되고 번역되었다.

본생담 벽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베산타라 왕자의 이야기이다. 혼자서 처음 불교를 배우던 시절, «불교성전»에서 베산타라 왕자의 이야기를 접하고는 어찌 이런 비인간적인 생애가 가능하겠는가, 잔뜩 의심을 품었던 적이 있다. 베산타라 왕자는 나라의 보배였던 흰꼬끼리를 다른 나라에 보시하여 부왕의 노여움을 사 처자식과 함께 왕궁에서 쫓겨난다. 그리하여 정처없이 길을 가던 중에 마차와 말마저도 남에게 넘겨주며, 끝내는 자식들과 아내마저도 남에게 넘겨준다. 이러한 베산타라 왕자의 처사를 두고, 그때의 나는 감동보다는 반감 비슷한 감정이 일었던 것같다. 어찌 이토록 대책없이 무력할 수가 있단 말이냐? 이런 것이 무슨 보시이며 이런 것이 무슨 불교의 가르침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제 돌아보니, 베산타라 왕자의 본생담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출가수행자의 험난한 내면 투쟁이라는 것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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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제17굴, 베산타라 본생담 벽화. 베산타라 왕자가 왕궁에서 쫓겨나는 장면. 아내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출가 자체가 자식을 버리는 일이요 아내를 버리는 일이요 부모를 버리는 일이다. 출가는 모든 소유물, 모든 소유관계를 끊는 일이다. 그러나 애착과 소유와 혈연의 관계를 남김없이 끊음으로써 수많은 중생을 향하여 가는 것이 곧 출가자의 길이요, 영광과 기쁨을 흩어버림으로써 더 큰 것을 성취하여 사람과 하늘을 이익되게 하겠다는 것이 곧 출가자의 발원이다. 출가자는 자식과 아내와 부모와 기쁨을 버리고서라도 성취해야 할 일대사가 있는 것이다. 그가 가는 길은 자식·아내·부모보다도 더 위대하고 더 귀한 길이다. 그것은 이른바 위대한 포기이며 동시에 위대한 성취이다 — 이런 결론을 얻기까지 끝없는 내면투쟁을 벌이는 것이고, 지난한 투쟁 끝에 마침내 한 명의 출가자, 한 명의 베산타라 왕자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 아잔타 석굴 내벽에 그린 베산타라 이야기는 그들 스스로의 자화상이 된다. 그들이 벽화를 그리는 순간 자체가 자식과 아내와 부모와 소유를 버리고 얻은 순간이다. 그 순간만이 유희하는 가운데, 위대한 포기를 성취한 가운데, 베산타라가 베산타라를 그린다. 마치 강물이 되어 강물을 흐르듯, 베산타라가 되어 베산타라를 흐르고, 그리하여 아잔타 벽화가 아득히 펼쳐진다. 그것은 내면 투쟁의 결실, 출가의 대 서사시, 위험하고 아름다운 벽화이다. 종교예술은 이렇듯 대상과 소재와 내면이 완벽히 일치할 경우에만 탄생하는 것이다. 서사와 그림과 예술가가 하나가 되는 예술 — 이것이 바로 아잔타 예술의 본령이 아닐까?
 

아잔타 석굴은 위험하고 아름다운 강물 위에 서 있다. 와고라 강물 위의 생애는 여느 생애와도 달라 보통의 짐작으로는 헤아리기 힘들다. 그 한 예가 육아백상(六牙白象) 본생담 벽화이다. 여섯 상아를 가진 흰 꼬끼리의 이야기는, 수행자의 삶, 보살의 삶이 어떤 식으로 타인에 의해 굴절되어 죽음을 맞을 수 있는가를 예시하고 있다. 여섯 상아의 코끼리는 숲에서 우연히 연꽃을 얻자 이를 첫째 부인에게 건넨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둘째 부인이 연꽃을 가로채어 받아지닌다. 흰 코끼리는 꽃이 원래의 목적지를 잃고 다른 대상에게로 옮겨가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자 꽃을 받지 못한 첫째 부인이 질투와 수모를 못 이겨 자결을 하며 비원을 한다, 내가 이 기억을 간직하고 다음 생에 태어나 반드시 저 흰 코끼리의 상아를 빼어가지리라.

여섯 상아의 흰 코끼리가 건넨 사랑의 꽃이 한 개인을 넘어 보편화됨으로써, 사랑의 방향이 타인에 의해 뒤바뀌는 것을 막지 않음으로써, 사랑과 죽음과 복수의 대 서사시가 펼쳐진다. 다음 생에서 왕의 딸로 태어난 암코끼리는 왕에게 육아백상의 상아로 상(床)을 만들고 싶다는 소원을 말한다. 왕은 신하를 보내고, 신하는 독화살을 지니고 숲으로 향한다. 여섯 상아의 흰 코끼리는 독화살을 지닌 자에게 유리한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고 무방비로 독화살을 맞는다. 그는 독화살을 맞고 쓰러지면서도 스스로 나무에 부딪혀 상아를 뽑아낸다, 그리고 상아를 신하에게 건넨다, 이 상아를 어서 가지고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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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제17굴, 육아백상 본생담 벽화. 여섯 상아의 흰 꼬끼리가 독화살을 쏜 자에게 상아를 뽑아 건네주고 있다.

꽃을 건네고 독화살을 맞는 과정에는 일반적인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터무니없는 오해와 그에 바탕한 감정의 물결이 거대하게 가로흐르고 있을 뿐이다. 여섯 상아의 흰 코끼리는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인과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인과까지도 선선히 받아들인다. 그는 스스로 감내할 인과응보의 범위를 최대한으로 확대시킨다. 그가 받는 응보는 우주적이므로, 중생이 아프면 그도 아프다. 그는 그 아픔을 온전히 스스로의 것으로 받아들여 마침내 죽음을 완성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진정으로 강한 이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서, 한 편의 전설처럼 한 편의 신화처럼 이야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진실은 육아백상의 길이 바로 수행자의 길이라는 것이고, 아잔타 수행자들은 이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석굴승원(비하라)에 이처럼 강도 높은 본생담 벽화를 눈앞에 그려놓았다. 서른 남짓한 아잔타 석굴들 중에서 벽화로 가장 유명한 석굴은 1, 2, 16, 17 굴 등인데, 이 석굴들은 한결같이 수행자들이 거처로 삼았던 요사채였다. 그들은 본생담의 주인공들과 정면 대결한 것이다. 그들은 본생담과 함께 일어나고 본생담과 함께 잠들었다. 그들은 본생담과 함께 깊은 강물을 흐르고, 본생담과 함께 별이 빛나는 고원을 유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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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타 제16굴, 난다의 삭발 장면(왼쪽)과 삭발 뒤 신부를 그리워하는 애달픈 장면(오른쪽).

따라서, 수많은 벽화들 사이사이에 출가의 장면이 없을 수 없다. 여러 본생담에는 출가의 장면이 삽입되어 있거니와, 불교예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에 해당했던 난다의 출가 장면, 즉 신랑 난다와 신부 순다리가 이별하는 순간도 제1굴의 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제16굴에서는 난다가 머리를 깎는 장면, 머리를 깎고 승단에 입단한 뒤 신부를 그리워하는 애달픈 장면도 고요히 지켜볼 수 있다.

아잔타 수행자들은 이러한 본생담과 출가의 벽화를 그림으로써 항상 스스로의 위대한 포기의 순간을 되돌아보았을 일이며, 또 역사적 인물들의 위대한 포기를 되돌아보았을 일이다. 그들은 아잔타 벽화를 곁에 둠으로써 경전에 등장하는 기라성같은 역사적 인물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었다. 역사적 인물들과 함께 호흡하는 일은 이렇듯 같은 길을 걸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들은 본생담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의 내면을 비춰주는 출가의 대 서사시인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아잔타 벽화는 화려한 예술이라기보다는 생명을 내놓고 법을 구하겠다는 출가수행자의 발심 그 자체이다. 화려한 영광과 관능적인 쾌락을 포기할지언정 구도의 길을 포기할 수는 없으며, 부모와 처자식을 떠날지언정 그 길을 버릴 수는 없다. 구도의 길이 위대하게 다가올수록, 구도의 길을 유혹하는 대상도 위대해진다. 그러나 본생담의 주인공들은 세간이 줄 수 있는 최대의 행복, 다름아닌 최대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위대한 포기의 길을 걸었던 이들이다. 그들의 길을 아잔타 석굴들에 수놓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였으니, 후대의 아잔타 수행자들은 또 다른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그들 모두의 길은 꽃을 건네고 독화살을 맞을 수도 있는 길, 우주적 인과의 길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순례자는 그 수많은 수많은 생애들, 그 수많은 수많은 출가수행자들의 유장한 호흡을 느끼며 아잔타 석굴을 배관해야 한다. 빛나는 성좌를 바라보듯 벽화를 바라보며 그들의 신화와 역사 속으로 길이길이 들어서야 한다. 그 위대한 포기자들, 그 구도의 길에 들어섰던 이들, 그 아잔타 벽화보다도 더 고귀한 이들, 끝없는 물결 위로 끝없는 하늘 위로 천천히 유영하는 이들, 연꽃과 거위처럼, 우주의 문양이 되어 우주의 별이 되어 고원을 유영하는 이들, 마침내 천상으로부터 지상으로부터 흠모와 존경을 받는 이들 — 그분들의 축복이 순례자들에게 있으시라. 그분들의 호흡이 부디 이 좁은 가슴의 순례자에게도 머무르시라.

꽃을 건네고 화살을 맞을지라도 — 아잔타 벽화”에 대한 1개의 댓글

  • 처자식의 출입을 막고자 철조망을 친 성철보다는 배고픈 식구들을 위해 충혈된 시린 눈으로 시장 바닥에 악다구니를 퍼붓는 장돌뱅이가 되고싶음은? 가련한 중생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보다는 천국을 은돈 몇냥에 팔아넘긴 가롯유다의 슬픈 싸타이어가 더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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