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다투듯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도 흐르지 않는다

승조 스님의 «조론肇論»의 <물불천론物不遷論>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然則旋嵐偃嶽而常靜。江河兢注而不流。野馬飄鼓而不動。日月歷天而不周。

이와 같다면 선람旋嵐의 바람이 수미산을 무너뜨린다 할지라도 항상 고요하며, 강하江河가 다투기나 하듯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해도 흐르는 것이 아니며, 봄날의 아지랑이가 나부끼며 올라간다 해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해와 달이 하늘을 지나간다 해도 우주를 한 바퀴를 돈 것은 아니다. (송찬우 역, 이하 동일)

“선람”은 우주가 무너지는 괴겁에 부는 바람을 뜻하며, “야마野馬”는 봄날의 아지랑이를 뜻한다. 이렇듯 바람과 강물과 아지랑이와 해와 달은 흐르고 움직이는 것, 즉 천류遷流하는 대표적 사물이지만 승조의 <물불천론>에서는 천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범부의 견해로 보면 참으로 괴이하지 않을 수 없다. 흡사 제논의 화살의 역설을 생각나게 한다.

감산 스님은 어려서부터 «조론»을 읽었는데, 그분 역시 현상의 사물은 천류하지 않는다는 종지에 이르러 멍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선람의 겁풍이 불어와 수미산을 무너뜨린다 해도 항상 고요하다고 한 등등의 네 구절에 의심을 하였다”고 고백했다. 바로 위 네 구절을 가리킨다.

감산 스님 당시에 «조론»에 대하여는 노장학의 허무사상을 불교적으로 말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나(어느 시대인들 이런 식의 평가가 지배적이지 않겠는가마는), 감산 스님만큼은 승조 스님이 제법의 실상을 심오하게 깨달은 분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조론» 내지 <물불천론>를 거듭 판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판각본을 교정하다가 깨달은 기연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산 스님으로서는 «조론» 내지 <물불천론>이 각별한 인연이 된다 하겠다.

그 깨달은 기연을 «조론약주肇論略註»에 기록하였는 바, 깊이 음미할 만하다:

나는 어제부터 이 논문을 읽었다. 나름대로 앞에서의 선람旋嵐·강하江河·야마野馬·일월日月의 네 사상이 천류하지 않는다는 의미에 의심을 품은 지가 오래였다.

동묘 스님과 함께 포판에서 삼동결제三冬結制를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 논문을 거듭 판각하고 교정을 보면서 네 사물이 천류하지 않는다고 한 대목에 이르러 황홀하게도 깨달음이 있어 뛸 듯이 기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이로 인해 부처님께 예불을 올렸더니 절을 하는 몸이 일어나거나 허리를 굽히는 모습이 없었다. 주렴을 걸고 밖으로 나와 살펴보았더니 뜰 앞에 서 있는 나무에 홀연히 바람이 불어와 낙엽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날았으나 잎마다 움직이는 모습이 안 보였다. 이로써 “선람의 바람이 수미산을 무너뜨린다 해도 항상 고요하다”고 한 말을 믿을 수 있었다. 변소에 가서 소변을 보았는데 소변의 흐르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탄식하며 말하였다.

“진실하구나. 강물이 다투듯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도 흐르지 않는다는 말씀이여.”

이때에 지난날 «법화경»에서, “생멸하는 세간의 모습이 상주불변하다”고 한 말에 대한 의심을 돌이켜 관찰해 보았더니 의심이 마치 얼음이 녹아 풀리듯 하였다.

이로써 알 수 있었다. 이 논의 종지가 그윽하고 은미하여 진실하게 참구하여 실답게 보지 않고 망상의 지견知見으로 헤아리려 한다면 모두가 막막한 의심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강물이 다투듯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도 흐르지 않는다”에 대한 6개의 댓글

  • 오랜만에 뵙습니다

    감히 엄두는 나지 않는 구절이지만 불생불멸을 말하는지…

    불교를 알면 알수록 어렵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김정렬
  • 반갑습니다. 저 역시 엄두가 나지 않는 구절입니다. 그저 감산스님의 말씀대로, “망상의 지견으로 헤아리려 한다면 모두가 막막한 의심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명심할 뿐입니다.

    고싱가
  • 모든 것이 변화하고 모든 것이 순환하니, 오직 이러한 변화와 순환만이 영원하고,

    또한 만물이 이러한 변화와 순환보다 큰 것도 없고, 변화와 순환보다 작은 것도 있을 수 없으며, 할 수 있는 일이란 변화하고 순환하는 것이고, 할 수 없는 일이란 변화하지 않고 순환하지 않는 것이니,

    소변줄기도, 아지랑이도, 흘러 흘러 바다로 가는 강물도 모두 변화하고 순환한다는 오직 단 하나의 흐름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작고 작은 미소한 순간과 찰나도 그로서 완벽한 순환이며, 모든 사물이 오직 미소한 찰나만을 계속하여 사는 것이니, 흘러도 찰나의 순환에서 보자면 흐르는 것이되 또한 흐르지 않는 것이고, 아지랑이가 피어올라도 피어오르는 것도 아니고 피어오르지 않는 것도 아니니,

    저의 이러한 어눌한 생각으로 죄송스럽고도 조심스런 마음으로 생각해보면, 감산스님은 이러한 찰나의 순간 속에서 살아있는 사물을 실제로 보게 되는 기연을 얻으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대부분의 사람이 꽃처럼 아지랑이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하는데, 감산스님이 판각본을 교정하시면서 오르지 순간 속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게 되자 이러한 찰나의 순간과 찰나의 순환이라는 기연을 얻게 되신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요한 것은 선생님이 다시 인용한 “망상의 지견으로 헤아리려 한다면 모두가 막막한 의심을 면치 못하리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 수련회 잘 다녀오셨나요? 건강하게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CTL
  • 만일 이러한 찰나의 순간이라는 경험도 자연스레 흐르게 놔두면 아마도 강물이 다시 흐르게 됨을 보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직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순간 속에 찰나 속에 자신을 두고 있지도 못하고 있으니, 만 마디 말이 다 소용없고 그저 끝없이 정진을 계속해야할 부족하고 또 부족한 중생임을 느끼게 됩니다. 선생님처럼 실참에 대한 생각을 요즘들어 하고 있습니다.

    말이 있으니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CTL
  •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선생님이란 호칭은 좀 어색하니까^^ 네티즌 예법대로 그냥 고싱가님이라고 불러주세요.

    놀랍습니다, 댓글이 니체의 통찰을 능가하는군요. 메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싱가
  • 텅텅 비었는데 …
    무엇이 오고 무엇이 간단 말인가?

    오는 이와 오는 작용은 연기가 아니든가?
    있다없다는 무의미!

    침묵ㅡㅡㅡㅡㅡㅡㅡ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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