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국 번역의 «비극의 탄생»

이제까지 니체 저작의 번역본들을 읽으면서 가장 실망했던 점은, 번역자의 성실성이었다. <비극의 탄생>을 예로 들자면, 역자는 적어도 희랍비극, 바그너 음악극 등에 관한 기본지식은 갖추어야 한다. 아울러, 니체가 인용하고 있는 인용문의 출처 정도는 최소한 확인을 하고서 번역해야 한다. 니체는 인용부호만 달 뿐 인용문의 출처를 거의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니체는 호기심 있는 학자들을 위하여 일부러 출처를 안밝히기도 했던, 학자들이 보기에는 고약한 취미의 소유자였다) <고증판 니체전집>의 보급판(KSA) 제14권에서 인용문들의 출처를 밝혀놓고 있거니와, 다른 독일어판(가령 골트만 출판사)이나 일본어역본에서는 인용문 출처뿐만 아니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상세한 주석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역자가 성의만 있다면 이런 책들을 참고하여 충분한 기본지식을 갖추고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아침놀>까지의 니체 저서들은 이런 정도의 성실성만 있다면 현저히 오역이 줄어들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즐거운 학문> 이후의 저서들은 이런 성실성만으로는 커버할 수 없는 그 뭔가가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성실성도 부족했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번역본들을 접해본 소감이었다. 사실 역자의 불성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토록 많은 번역본들이 신뢰를 얻기 힘든 것이고 필요 이상으로 오역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다. 거기에다 독일어 구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를 하나둘 확인하게 되면, 번역본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말해, 최소한 학자적인 엄밀한 자세와 성실성만 갖추고 있다면 오역이 나오더라도 모든 역자가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 정도로 간주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 엄밀한 자세와 그 성실성이 없기 때문에 그간의 <비극의 탄생> 번역본들에 대하여 실망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이제 박찬국 교수의 번역본이 출간됨과 함께 그 실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면밀한 자료조사와 성실성이 확보된 번역본이라고 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말 그대로 번역자의 “기본”의무이기에 그 의무를 다했다고하여 칭찬하기는 좀 그렇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예를 들어보자. 7절에는 니체가 셰익스피어의 햄릿론을 펼치는 와중에 “몽상가 한스”가 나오는데, 이는 셰익스피어 번역자였던 슐레겔이 “John-a-dreams”를 “Hans der Träumer”로 옮긴 것이다. 역자는 이를 주석에서 밝혀놓고 있다. 이런 주석은 햄릿을 읽고 슐레겔의 번역본을 확인해야 나올 수 있는 주석이다. 물론 나는 역자가 그런 과정을 거쳐 이 주석을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독일의 골트만 출판사 판도 이것을 <뉘른베르크의 노래의 명인들>에 나오는 Hans Sachs라고 잘못 주석을 하고 있을 정도이니 결코 쉬운 구절은 아닌 셈인데, 아마도 역자는 일본어역본의 주석을 참고했을 것이다. 일본의 역자들이야말로 이런 주석에서는 가장 탁월하고 성실할 것인데, 나는 성실한 번역을 위해서는 당연히 일본어역본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나 역시 예전에 <비극의 탄생>을 독해할 때 “몽상가 한스”의 의미를 일본어역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이런 주석을 달았다는 것 자체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전거들을 일일이 확인함으로써 그만큼 오역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에 칭찬하는 것이다. 이 전거를 알고 번역하는 것과 모르고 번역하는 것은 문맥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박찬국의 이런 성실함 때문에, 독자들은 주석이 필요한 대목에서 어김없이 관련 주석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Phänomen”(괴테식 의미에서의 현상)과 “Erscheinung”(관념론적 의미에서의 현상)을 구별하여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소박문학”과 “감상문학”의 구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6절의 “올림포스”가 산이름이 아니라 인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바그너의 “불협화음”이 어떤 음악사적 의의를 갖는지 감잡을 수 있을 것이고, 니체가 밝히지 않은 인용문들의 거의 모든 출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그만큼 오역의 가능성이 줄어들었음도 당연하다. 한 마디로 <비극의 탄생>의 면밀한 독해와 이해를 위한 예비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비극의 탄생>은 니체가 “서투르고, 둔중하며, 힘겨우며, 비유가 난무하고 꼬여 있고, … 템포가 일정하지 않다”고 자평할 정도로 문체가 (니체가 그토록 비난했던 의미에서) ‘독일적’이이서 이 문체를 그대로 살려서 번역하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둔중하다고 자평했던 문체를 둔중하지 않게, 아름답게 번역하는 것도 웬지 께림직하다. 말은 쉽게 했지만, 사실 이 지점은 모든 역자들이 고심할 수밖에 없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박찬국 번역본은 문체를 가지런히 정리해서 번역하는 방향을 택했다. 즉 문장을 딱딱 끊어서 번역함으로써 미묘한 의미 전달의 손실을 감수한 대신에 독자들이 <비극의 탄생>에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이 번역본은 지난해에 벌어졌던 번역본 논쟁의 연장선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교수신문에서는 2006년 1월 2일, 연재기획 “고전번역비평 – 최고번역본을 찾아서”의 한 꼭지로 니체의 ‘비극의 탄생’·’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고문을 통하여 김대경 역본을 추천했다. 박찬국이 이 글을 기고했는데, 책세상 니체전집의 번역자로 참여했던 그가 그 전집의 편집위원이었던 이진우의 번역본을 비평한 것이어서 파장이 좀 컸던 것같다. 그런데, 이후 «잔혹한 책읽기»의 번역서평으로 잘 알려진 강대진이 전혀 잔혹하지 않게 이진우의 또 다른 니체 번역본을 비평했다. 그의 기고문은 니체 전집 완간에 대한 기쁨과 몇가지 아쉬움이다. 제목과는 달리 니체번역 전반을 비평한 것이 아니라 이진우가 유고번역본에서 고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범한 번역오류 몇 군데를 지적하고 넘어간 것이다. 이러한 두 비평에 대하여 2006년 2월 7일에 이진우가 교수신문에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기고문을 통하여 응대했다. 그는 특히 박찬국의 비평을 강하게 비판했다. (좁은 동네에서 이런 정도의 비평이 오가면 아마도 학회모임에서는 서로 얼굴 보기가 민망할 것이다.)

그 이후 더 이상의 논쟁은 없었는데, 이번에 박찬국이 <비극의 탄생> 번역본을 출간했다. 그러니까 이 번역본은 그 논쟁의 연장선으로도 읽을 수 있다. 과연, 역자 서문에서 박찬국은 그간의 번역본들에 대하여 총평하고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김 대경 씨의 번역은 1982년에 출간된 이래 가장 많이 읽힌 번역본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자연스럽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지면서도 여러 곳에서 오역을 범하고 있으며, 원문의 몇 줄을 번역하지 않은 곳들도 있다. 이진우 씨의 번역본은 김대경 씨의 번역이 범하고 있는 오역을 상당 부분 바로 잡고 있으며 번역을 빠뜨린 부분도 없지만, 그럼에도 여러 곳에서 오역을 범하고 있고 부자연스런 표현으로 인해 읽어 나가기가 쉽지 않다.

<비극의 탄생>이 8종의 번역본이 나왔다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우리나라 독자들의 관심이 지극히 크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동안 나온 번역본들이 독자들의 이러한 관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데 일조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번역에 착수했다. 본인이 과연 기존의 <비극의 탄생> 번역들보다 더 나은 번역을 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독자들의 아낌없는 꾸짖음을 기대한다.

[중략] 앞에서 박준택 씨와 김대경 씨 그리고 이진우 씨의 번역본을 비판했지만 이분들의 번역을 많이 참고했다. 이분들의 번역이 큰 도움이 되었으며, 그런 선행 작업이 없었더라면 본인의 번역은 훨씬 힘든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겸허한 고백이다. 내가 보기에 박찬국 번역본은 이런 고백을 할 정도로 앞선 번역본들에 빚을 졌다고는 보지 않는데(앞선 번역본들은 정말 독자들의 관심에 부응하지 못했다), 아마도 교수신문에서 오간 논쟁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책세상 니체전집 번역에 서로 얽혀 있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런 고백이 나왔을까 싶다. 아무튼 이 번역본은 이러한 비평 과정의 산물로도 자리잡고 있어, 책세상 니체전집의 면목에 흠이 좀 생기게 되었다. 기묘한 상황이기는 한데, 더 나은 번역본을 위해서라면 이런 기묘한 상황은 언제라도 환영이다.
 

이제 “독자들의 아낌없는 꾸짖음” 순서이다. 박찬국 번역본이 역자로서의 기본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는 하지만, 오역이 없을 수 없다.

17면: “당시 내가 나의 청춘의 용기와 악의를 분출시켰던 그 책”(das Buch, in dem mein jugendlicher Muth und Argwohn sich damals ausliess)
– “악의”는 지나친 번역이다. Argwohn은 다른 사람의 행위나 태도 뒤에 나쁜 의도가 숨겨져 있지 않나 추정하는 것으로, “혐의, 의혹”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 그러니까 당대 고전문헌학, 더 나아가 학문 일반의 행태에 대해 의혹을 가졌다는 말이다. 20면에서는 적절하게 “불신”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유독 “악의”로 번역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국내 번역자들이 이런 뉘앙스 차이를 사소하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른 철학자는 몰라도 니체의 경우에는 아주 중요하다. 그 유명한 “나는 하나의 뉘앙스이어니…” 하는 구절도 있잖은가.

24면: “논리와 세계의 논리화에 더욱 열광하게 되고”(nach Logik und Logisirung der Welt brünstiger)
– brünstig는 “발정하다”가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뜻이다. 이것을 “열광”으로 번역하여 의미를 순화시키고 있는데, 니체가 드물게 사용되는 그런 고아한 뜻으로 이 단어를 선택했다고 보긴 어렵다. 학자들이야 “논리에 더욱 발정을 한다”는 표현이 불쾌하겠지만, 본시 니체가 그걸 의도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은 오역이 아니라 해석의 문제이다.

29면: “도덕적 주제에 대한 가장 빗나간 도식화로서의 기독교, 이것에 인류는 지금까지 귀를 기울여 왔던 것이다.”(das Christenthum als die ausschweifendste Durchfigurirung des moralischen Thema’s, welche die Menschheit bisher anzuhören bekommen hat)
– “Figurierung”에 “도식화”라는 뜻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음악용어로서 보통은 “음형”이나 “음형법”으로 번역된다. “귀를 기울여 왔다”는 술어는 Figurierung이 음악용어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 대목은 “도덕적 주제가 한껏 빗나가 전개된 음형으로서의 기독교” 정도로 옮겨야 한다고 본다. 니체는 작곡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35면: “대위법적인 발성술과 귀의 현혹술 아래에는 분노와 파괴욕의 기저음이 으르렁거리고 있지 않는가?”(Brummt nicht ein Grundbass von Zorn und Vernichtungslust unter aller Ihrer contrapunktischen Stimmen-Kunst und Ohren-Verführerei hinweg)
– “contrapunktische Stimmen-Kunst”는 대위법적인 발성술이 아니라 대위법의 성부기법을 뜻한다. 그리고 Grundbass는 “기저음”이라 하지 않고 보통 “통주저음”이라고 번역한다. 바로크시대에 유행했던 건반악기 반주기법인데, 주어진 단음의 저음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저음부 파트와 관련이 깊다. 그래서 오르간 저음 건반의 “우웅-” 하는 웅장한 소리를 연상하면 된다. 이 소리는 동물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다.

53면: “인간의 참된 생각은/ 꿈 속에서 나타난다”(des Menschen wahrster Wahn/ wird ihm im Traume aufgethan)
– Wahn에 “생각”이라는 뜻은 없다. 말 그대로 “광기”나 “망상”이다. 아마도 “가장 참된 망상”이라는 것이 형용모순이니까 “생각”으로 번역했을 텐데, 형용모순이라는 것 자체가 협소한 논리학의 산물 아닐까? 그 논리를 부수고 등장하는 빛나는 싯구인데 역자의 사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사고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으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대목은 원문을 존중해서 그대로 번역해야 한다. 가령, “더없이 진정한 광기”로. 그리고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뉘른베르크의 노래의 명인들>의 서사구조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59면: “성 화이트”(Sanct-Veit)
– 남부 이탈리아 출신의 4세기 순교자 성 비투스이다. 독일어로는 성 바이트(Sankt Veit)로 음역된다. “성 화이트”는 일본어 발음에서 건너온 기괴한 이름이다. 아마도 기존의 번역본들이 한결같이 “화이트”로 번역하니까 무작정 따랐을 것이다.

60면: “이제 곤궁과 자의, ‘뻔뻔스런 작태’가 인간들 사이에 심어놓은 완강하고 적대적인 모든 제한이 파괴된다.”(jetzt zerbrechen alle die starren, feindseligen Abgrenzungen, die Noth, Willkür oder “freche Mode” zwischen den Menschen festgesetzt haben.)
– 문장을 잘못 이해했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오역이라기보다는 해석의 문제인데, “이제 인간들 사이에 필요냐, 자의냐 아니면 “버릇없는 풍조”냐를 확정하던, 요지부동 적대적이던 온갖 한정이 무너진다”가 바른 이해라고 본다.

66면: “이 기괴하게 생긴 무적의 디오니소스적인 힘 이상으로 위험한 힘은 없었으므로 아폴론은 메두사의 머리를 방패로 삼아 그것에 대항할 수 있었다.”(Apollo, der das Medusenhaupt keiner gefährlicheren Macht entgegenhalten konnte als dieser fratzenhaft ungeschlachten dionysischen)
– 좀 난해한 대목이긴 하다. 이 문장은 디오니소스의 힘보다 더 위험하지는 않는 힘, 그러니까 디오니소스의 힘보다 덜 위험한 힘에 대항하여 아폴론이 메두사 머리를 들이대어 방어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 본토는 처음에는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을 직접 접하지 않고 풍문을 통해서 접했기에 그것은 진짜배기 디오니소스의 힘보다 덜 위험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메두사 머리가 박혀진 방패로 대항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그러나 그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이 마침내 직접적으로 분출되자 아폴론은 더 이상 그 방패로 가로막지 못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는 게 니체의 서술 내용이다. 결국, “디오니소스적인 힘보다 덜 위험한 힘에 대항하여 메두사 머리를 들이댈 수 있었던 아폴론” 정도로 고쳐야 할 것이다.

67면: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광란에서 비로소 자연은 예술적 환희에 도달하며, 그것에서 비로소 개별화의 원리의 파기가 예술적 현상이 된다.”(Erst bei ihnen erreicht die Natur ihren künstlerischen Jubel, erst bei ihnen wird die Zerreissung des principii individuationis ein künstlerisches Phänomen.)
– “예술적 환희”, “예술적 현상”이 아니라 “예술가적 환희”, “예술가적 현상”이다. 이것은 니체의 아티스트 형이상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후의 “künstlerisch”가 등장하는 모든 대목에서 “예술가적”으로 번역하지 않고 “예술적”으로 잘못 번역했다. 이와 함께 “Genius”도 아티스트 형이상학의 주요 개념인데, “천재”라고 번역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을 “천재”로 번역하지 않은 이유는 현대의 천재 개념과 영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개념은 역사적이고 끊임없이 변천한다. 이 시대의 개념, 정확히 말하자면 역자가 생각하고 있는 “천재”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Genius”를 “영혼”(69면, 96면), “예술가”(79), “정신”(89)으로 옮기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그것이야말로 흔히 말하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닌가?

68면: “디오니소스적인 음악과 음악 일반의 성격을 이루고 있는 바로 그 요소 …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조화의 세계는”
– 이 구절의 “Harmonie”는 “조화”가 아니라 “선법”이다. 이런 대목이야말로 니체가 언급한 문헌학적 독해가 필요한 곳이다.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 음악에 대한 기본지식을 갖추고서 이 문맥을 독해하게 되면, “화음”이나 “조화”가 아니라 반드시 “선법”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요구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박종현의 플라톤 번역만 해도 모두 이런 철저한 문헌학적 독해를 거친 것이다. <국가>를 보면, 고대 그리스 음악에 대한 세세한 주석이 있다. 나는 이런 작업이 니체 번역에서도 당연히 요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87면: “도리스 예술의 단계를 저 예술충동들의 정점이자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계속해서 이러한 생성과 활동의 최후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 이 구절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는 두 예술충동이 예술의 발전을 이끄는 과정을 전투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는 문맥에 위치해 있다. 가령 도리스 예술을 전방에 배치된 아폴론적인 것의 “전투진영”이라고 정의한다던가, “지배”, “침투”, “투쟁”이라는 어휘들을 동원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리고 이런 전투과정의 최후단계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구절인데, “이러한 [아폴론/디오니소스 전투의] 생성과 활동의 최후의 계획”은 어쩐지 좀 이상하다. 역자가 Plan이라는 낱말이 두 낱말이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즉, “(전투)평원”을 의미하는 Plan과 “계획”을 의미하는 Plan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러한 생성과 추세의 최후의 전투평원” 정도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그 최후의 전투평원은 다름아닌 아티카 비극이다.

108면: “우리는 이상에서 언급한 모든 예술원리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Alle die bisher erörterten Kunstprincipien müssen wir jetzt zu Hülfe nehmen.)
7절을 시작하는 문장인데 착오이며 오역이다. “이제까지 논의되었던 모든 예술원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로 고쳐야 한다. 이 문장 이후, 이제까지 역사적으로 합창단과 관련하여 논의되었던 바를 살펴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니체는 이 7절에서 합창단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식) 정치적 견해, 슐레겔의 정의, 실러의 정의를 하나하나 검토하기 때문이다.

113면: “실러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무대 위에서는 대낮 자체라 하더라도 인공적인 대낮일 뿐이며, 건축물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다. 운율적 언어도 현실 언어를 이상화시킨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착각[슐레겔식의 착각]이 만연되어 있다.”(Während der Tag selbst auf dem Theater nur ein künstlicher, die Architektur nur eine symbolische sei und die metrische Sprache einen idealen Charakter trage, herrsche immer noch der Irrthum im Ganzen)
– 역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착각이 만연되어 있다”의 구절에서 “슐레겔식의 착각”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는데 이는 오해이다. 이 오해에 바탕해서 “오류”Irrthum라고 옮겨야 할 것을 억지로 “착각”으로 번역했을 것이다. 실러의 정의(’합창단은 이상적 토대와 시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비극 주위를 두루고 있는 인의 장벽이다’)는 자연주의, 즉 (현대의 의미와 좀 다르겠지만) 리얼리즘에 대한 대항이다. 그러니까 실러는 이상주의자로서 자연주의를 염두에 두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주의(리얼리즘)는 “극에서의 대낮은 예술적인 대낮이 아니라 현실의 대낮이어야 하며 건축물 역시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건축물이어야 하며, 운문 역시 실제 언어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 대목은 “(실러는) 극에서의 대낮 자체는 다름아닌 하나의 예술적인 것이며, 건축은 다름아닌 하나의 상징적인 것이며, 운율을 따르는 언어는 하나의 이상적인 성격을 지닌 것인데도, 여전히 계속해서 전반적으로 오류가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정도로 옮겨야 한다. 슐레겔의 정의(’합창단은 이상적인 관객이다’)는 실러가 비판하는 바와 무관하다.
 

이상 <비극의 탄생> 25절 중 ‘자기비판의 시도’와 7절까지 간략히 검토해본 내용이다. 사실 박찬국 번역본은 기존의 번역본들이 저지르고 있는 오역들을 대폭 개선했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문장도 굉장히 잘 읽히고 꼼꼼히 읽은 흔적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해한 대목에서는 여전히 오역이 살아있다는 점은 유감이다. 이것은 니체 번역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앞으로 개선해야 할 일이다.

역자가 “독자의 꾸짖음”을 당부하고 있기에 몇 군데를 지적해 보았으나, 이 번역본에 쏟은 역자의 성실성에 비하면 이런 정도의 오역은 사소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요컨대 이 번역본은 신뢰할 만한다.

박찬국 번역의 «비극의 탄생»”에 대한 7개의 댓글

  • 벗들에게: 오랜만에 글을 썼네요. 이제 마음이 정돈된 만큼 휴지기를 거두고 글을 쓰렵니다. 그렇다고 부쩍 쓸 거리가 늘어난 것은 아니고요, 그저 간간히 생각나는 대로…

    고싱가
  • 책 읽을 짬이 안 날 때도 구독하는 몇 블로그의 글은 꼭 읽으려고 합니다. 하여 새 글이 반갑습니다. ‘비극의 탄생’의 새 역본도 반갑고요. 짧은 독서 경험에 비춰보면 아카넷의 대우고전총서 시리즈는 꽤 믿을 만한 책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아카넷에 눈 밝은 편집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책이란 지은이나 옮긴이의 것이기도 하지만, 편집자의 능력을 뛰어넘는 책은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좋은 글 잘 읽고, 불 하나 대롱에 담아 훔쳐 갑니다.

    엔디
  • 불 하나 대롱에 달아 . . . , 어쩌면 이런 멋진 표현을^^ 아카넷의 시리즈가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사람마다 취향은 다르겠지만, 제 손에 들고 다니면서 읽기 무척 편한 편집과 판형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약간 작은 감은 있지요. 책세상의 시리즈는 책이 너무 크고 무겁고 글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고 해서 책의 외형적인 면에서 저한테는 기피대상 일순위입니다. 출판사마다 눈 밝은 편집자와 감각 있는 디자이너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싱가
  • 아, 니체의 저작들에 이렇게 깊은 관심을 가진 분이 있다는 사실에 놀랍고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 한 편으로는 제 자신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비극의 탄생>은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니체의 저작이기도 하고, 또 저의 진로에 결정적인 문제의식을 던져준 저작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박찬국 역의 <비극의 탄생>도 꼭 구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듭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박민호
  • 반갑습니다. 민호님의 의견 중 <비극의 탄생>이 무슨 이유에선가 지워져 있는 듯하여 제가 추가하였습니다. 아마도 꺾쇠괄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진로에 결정적인 문제의식을 던져준 저작”이라니 저와 비슷하네요. 반가운 마음이 절로 듭니다.

    고싱가
  • 안녕하세요, 오래전부터 멀리서 보고 배우기만 하다가 갑작스레 인삿말 남깁니다.
    독일에 있을 때 선생님의 번역과 여러 설명에 힘입어 니체를 읽었던 기억이 새록 떠오르네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최성웅 드림.

    최성웅
  • 네, 감사합니다^^ 오늘 같이 날씨 좋은 날, 독일 추억이 새롭겠군요.

    고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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