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의 장소들(3) — “화염이자 숯덩이여라!”

Ich sehe nicht, dass ich Gluth und Kohle wäre. Aber der Gerechte ist Gluth und Kohle!
나는 내가 화염이자 숯덩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화염이자 숯덩이여라!
 
— <차라투스트라의 허두> 3

화염과 숯덩이는 각기 다른 이질적인 존재다. 그것들은 둘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화염이자 숯덩이”이다. 그러니까 정의로운 자는, 이질적인 둘이 하나가 된 존재다. 화염이면서 동시에 숯덩이인 존재,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궁금증은 독자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것은 니체 자신에겐 명료한 사실이지만, 다른 이들에겐 너무나 불명료하다. 니체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자”라는 별칭을 받을 만하다.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헤라클레이토스는, “번개는 만물을 타고간다”(Diels-Kranz 22B64)고 했다. 이 말은 히폴뤼토스가 전한 단편이다. 그러므로 맥락을 통하여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이 세 단어, “번개는 만물을 타고간다”만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찌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흡사 이런 식의 헤라클레이토스 단편들로 채워져 있는 듯하다.

내가 이렇게 불명료한 구절을 서두에 꺼내는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배운 방식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대목들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역자들이 그토록 오역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오역이 없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 국내에 번역본이 십여 종 출판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어느 번역본에도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잠시 이야기를 돌려보자. 이진경은 한겨레신문의 기고문에서 선불교의 대표적인 어록인 «벽암록»을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쪽이 하나도 없었지만, 무언가 피할 수 없는 강한 감응을 주는, 그래서 결코 손을 놓을 수 없는 책”이라고 고백했다. 단 한 쪽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세 권짜리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책을 다 읽을 수 있다. 불가사의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일이 가능하다.

내가 보기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이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벽암록»과도 같다. 그렇잖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서 즐겨 읽는다. 다만 차이라면, «벽암록»을 꿰뚫은 자들로는 유사 이래 수많은 선지식들이 존재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 단편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만 분분하다. 나는 이것이 수행자와 학자의 차이,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니체의 독해를 위해서는 수행자적인 안목이 있어야 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면, 아마 니체 전공자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니체 독자들에게 반감을 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안목이 없이는 니체의 위대한 통찰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내가 니체를 종교적 세계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통찰이 일반적인 사고(그러니까 학문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고준한 경지에 있음을 천천히 입증해 보이고 싶다는 것뿐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니체가 확연히 이해되는가? 학자들의 논문을 읽으면 시원하게 뚫리는가? 아닐 것이다. 단언하건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도교육의 틀 내에서 니체를 간파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니체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차원, 뭔가 다른 방식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니체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험” 혹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니체 자신의 말을 우리는 너무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그런 일면을 확인해 보자:

Ich sehe nicht, dass ich Gluth und Kohle wäre. Aber der Gerechte ist Gluth und Kohle!
나는 내가 화염이자 숯덩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화염이자 숯덩이여라!

문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활활 타오르는 숯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활활 타오르는 숯이다!

승자 나는 내가 이글이글 타는 불이며 숯불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정의로운 인간이란 이글이글 타는 불이며 숯불인 것을!

동호 나는 작열하는 불꽃도 숯도 아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은 불꽃이요 숯이다!

희창 나는 내가 타오르는 불꽃도 숯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타오르는 불꽃이며 숯이다!

위의 번역문들은 “불꽃이며 숯덩이”라는 것, 둘이 하나라는 것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지 못하다. 일단, “활활 타오르는 숯”(문수), “이글이글 타는 불이며 숯불”(승자)은 몹쓸 번역이다. “불꽃과 숯”으로 명확하게 나뉘어 있는 것을 대강대강 주물러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자신들의 감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 불꽃도 숯도 아니다”(동호, 희창)는 문장 역시, “불꽃이자 숯인 것은 아니라는 것”, 즉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나는 […] 불꽃도 숯도 아니다”는 번역문이 어째서 잘못되었는가? 이 번역문은 “dass ich Gluth und Kohle wäre”(내가 불꽃이며 숯덩이라는 것)이 접속법2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 안의 내용은 불가능한 의미여야 한다. 그래서 “불꽃이면서 동시에 숯덩이”라는 의미로 번역해야 하며, 이 말을 부정하자면 “불꽃이면서 동시에 숯인 것은 아니다”가 되어야 한다. 결국, “나는 […] 불꽃도 숯도 아니다”는 번역문은 원전의 심오한 해석 가능성을 박탈하고 있다. 이점에서는 승자의 번역이 유일하게 원문의 의도를 잘 살렸지만, “숯”을 “숯불”이라고 하는 바람에 도로묵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이질적인 둘이 하나가 되는 것, 혹은 하나인 것이 둘이 되는 것에 대한 니체의 비유법은 숲속 성인과의 만남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와 성인이 서로 헤어질 즈음에 나눈 대화를 읽어보자(<차라투스트라의 허두> 2):

“그러면 성인께서는 숲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차라투스트라가 물었다.

노래하고 울고 웃고 흥얼거리며 신을 찬미하는 게야. 그 신은 나의 신. 헌데 자네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하려는고?

차라투스트라는 이 말을 듣고 나서 성인을 하직하며 말했다: “내가 당신들께 드릴 게 무엇이 있으리오! 그러하니 어서 나를 놔두시오, 내가 당신들에게서 그 무엇도 취하지 않도록!”

위 인용문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 말을 살펴보자:

Was hätte ich euch zu geben! Aber lasst mich schnell davon, dass ich euch Nichts nehme!
내가 당신들께 드릴 게 무엇이 있으리오! 그러하니 어서 나를 놔두시오, 내가 당신들에게서 그 무엇도 취하지 않도록!

문수 나는 당신께 드릴 만한 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하도록 빨리 보내 주십시오!

승자 내가 당신들에게 줄 무엇을 가졌으리오. 그러니 내가 당신들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아가지 않도록 나를 어서 보내주오!

동호 그대에게 줄 무엇이 내게 있겠는가. 나로 하여금 서둘러 나의 길을 가도록 하라. 내가 그대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하도록!

희창 드릴 것이 뭐 있겠소! 당신에게서 그 무엇을 빼앗는 일이나 없었으면 하오. 그러니 나를 빨리 보내주기나 하시오!

승자만 제외하고 모두 “당신들”을 “당신”이나 “그대”로 옮겼다. 2인칭 복수대명사를 2인칭 단수대명사로 뒤집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번역이 가능할까? 오역을 한 역자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대화 상대자가 성인 한명 뿐이므로 “당신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맥락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바로 앞 문장에서 성인이 “노래하고 울고 웃고 흥얼거리며 신을 찬미하는 게야. 그 신은 나의 신. 헌데 자네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하려는고?” 물었던 일을 잊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성인”과 “성인의 신”을 두고 분명하게 “당신들”이라고 지칭했다. 이는 “신을 믿는 인간”은 하나인 자기 자신을 둘로 쪼개서 살아가는 인간임을 지적한 것이 아니겠는가?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분리된 실존의 인간으로부터, “당신들”로부터 그 무엇도 얻어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서둘러 헤어지지 않았겠는가! — 아무튼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은 젖혀두더라도, 원문은 원문대로 옮겨야 한다. 역자들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해서 “당신들”을 “당신”이라고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자들은 버젓이 그렇게 옮기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원문에 대한 존경심이 없단 말인가.

 

원문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역자들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조금이라도 생소한 문장이 등장하면 갈팡질팡 헤매기 일쑤라는 것이다:

Ich will die Menschen den Sinn ihres Seins lehren: welcher ist der Übermensch, der Blitz aus der dunklen Wolke Mensch.
나는 인간들에게 그들 존재의 의미를 가르치고 싶다: 그 의미는 초인, 먹구름에서 떨어지는 번개 인간.

문수 인간이라는 검은 구름을 뚫고 번쩍이는 번개다.

승자 검은 먹구름인 인간으로부터 뚫고나오는 번개이다.

동호 사람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이다.

희창 인간이라는 검은 구름을 뚫고 번쩍이는 번개가 아닌가.

“먹구름”과 “인간”을 병치시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번개 인간”이라는 말에서 무슨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welcher ist der Übermensch, der Blitz aus der dunklen Wolke Mensch“에서 운율상으로 “초인은 인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다른 대목에서 “그 번개, 이름하여 초인이라 하노라”라고 하였으므로, 역자들은 그 대목에 따라 “초인”과 “번개”를 병치시키기 위해서 “먹구름”과 “인간”을 병치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 독해의 어려움 중의 하나는 그런 식의 평행해석이 잘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번개 인간”이 너무 희화적이라고? 아니, 이보다 심오한 비유가 어디 있는가! “번개 인간”이 “화염이며 숯덩이인 존재”라는 생각을 해볼 수는 없겠는가? 재를 짊어지고 산으로 가서, 자신에게서 환한 불꽃을 발견하고, 불을 들고 계곡으로 내려온 차라투스트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고 보니, “인간이라는 먹구름” 따위로 옮기려면 “aus der dunklen Wolke Menschen“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먹구름”은 문법적으로도 허용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이 오역은 번개, 불, 화염, 불꽃, 숯, 재 등등 비유들의 연관성, 참으로 심오한 면면을 전부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책은 몰라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오역은 독자들에게 이토록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그때 자네는 자네의 재를 짊어지고 산중으로 갔어: 오늘은 자네의 불을 들고 계곡으로 가려는가?(<차라투스트라의 허두> 2)

형제들이여,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나는 나를, 고통당하는 자를 극복했다, 내 자신의 재를 짊어지고 산으로 갔다, 더욱 환한 불꽃을 내게서 발견했다.(<배후세계 신봉자들에 관하여>)

나는 인간들에게 그들 존재의 의미를 가르치고 싶다: 그 의미는 초인, 먹구름에서 떨어지는 번개 인간.(<차라투스트라의 허두> 7)

나는 위의 문장들의 심오한 연관 가능성을 제기하는 한편으로, 앞서 인용했던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번개는 만물을 타고간다”도 함께 음미해 본다. 설명을 하기는 어렵지만(그리고 이것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니체도 누누히 강조했다시피!), 어쩐지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는 듯하다. 혹시, 니체와 헤라클레이토스는 뭔가 우리가 모르는 고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는 철학자들이 아닐까? 혹시, 그 연관성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의 인문교육에서 뭔가 열등한 것만 배웠던 것이 아닐까?

물론 위 문장들의 연관 가능성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 나의 본래 의도는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원문으로 읽을 때는 이런 해석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지만 번역본으로 읽을 때는 이런 해석 가능성이 완전히 닫혀 있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논문 저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감출 수 있겠지만, 역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결코 감추지 못한다. 번역에서는 그것이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게 역자들의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역자들이 원문을 심심찮게 훼손하면서 그리고 문법이나 구문론을 자주 무시하면서 자기이해로 칼질하는 것은, 그들의 부주의 탓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역부족 탓으로 돌리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부디 용서해 달라, 분명코 “역자들의 역부족” 탓이다. 니체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든 독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든, 그들은 모두 단계가 낮은 “현대인”들이다.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진심으로 나의 차라투스트라에서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겠노라고 불평했을 때, 나는 그더러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거기에서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곧 체험했다는 것을 뜻하므로, “현대”인이 도달할 수 있는 명멸자의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오르시라. 어찌 내가, 이런 거리감을 갖고서,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들에게서 읽히기를 바라기라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개선가는 쇼펜하우어와는 정반대이니, 나는 말한다, “나는 읽히지 않는다, 나는 읽히지 않으리라.” (KSA 6, 298-299)

독일인이 독일어로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마당에, 오역이 즐비한 우리나라 번역본으로 이해가 된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기적일 것이다. 국내 번역본은 모두 “현대인”에 의한 번역본이므로, 이 번역본들로 읽는 이상,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현재 그 누구에 의해서도 “읽히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읽히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역자들을 비평한다는 것이 몹시 괴롭다. 사실 이런 비평들은 내 성정에 어울리지 않는 것인데, 우리나라 니체번역 현실의 암울함에 편승해서 마음이 격해지기도 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널리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더불어 역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각운을 맞추어 썼던 니체의 시 한편도 함께 전한다:

이 사람을 보라

그렇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알고 있어라!
만족이라고는 모른 채, 불꽃마냥
나 환히 빛나 나를 삼키노라.
내가 쥐는 것마다 모두 빛이 되고
내가 두는 것마다 모두 숯이 되니:
분명하여라, 나는 불꽃이어라. (KSA 3, 367)

오역의 장소들(3) — “화염이자 숯덩이여라!””에 대한 5개의 댓글

  • 기존 번역서들이 번역이 아니라 창작을 해놓은 부분이 많군요. 대비가 하도 명쾌해서, 참 재미있게 따라 읽고 있습니다. 니체는 지식만으로 이해되어지지 않는군요. 어떤 시적(?)영감 속에서 다가오는….
    그래서 당대에도 그렇게 이해받지 못했고, 교양수업 때 교수님 강의는 도무지 알아들 수가 없었나 봅니다.

    강물
  • 강물 선생님, 추사고택의 “백송”에 관한 문자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싱가숲
  • 이 구절은 ‘정당한 사람’에 대한 해석에서 출발해 볼 수 있습니다.
    27챕터 23연에는 이런 말이 나오죠.

    (저, 백석현의 짜라두짜 번역입니다.)
    또 한 줌도 안 되는 자기정당성(自己正當性) 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있어.
    이 알량한 자기정당성에 힘입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엄청 분노하지.
    세상 전체가 이들의 부당한 분노에 빠져 숨이 막혀 죽는 셈이야.

    본문은 자기정당성이 아니라, Gerechtigkeit입니다.
    영어로는 righteousness입니다. ‘정당함에 대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결국 Selbst-Gerechtigkeit로 해석해야 합니다.
    영어로는 self-righteousness를 뜻하지요. 아주 나쁜 뜻입니다. 바리새 같은, 교만하고 위선적인, 자기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지요. 우리 말 표현으로로는 별로 쓰이지않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는 평소 이 단어를 ‘자기정당성에 대한 과도한/위선적인 확신’이라고 써왔습니다.

    그리고..그 ‘화염’이 Gluth가 실은…”불이 살아 있는 재”입니다. 영어로는 ember입니다.
    우리 옛날에 화로에 담아 방에 들여놓는 …그런 재 ..혹은 바비큐 구워먹을 때 재입니다.

    자 , 그 재 위에 숯을 얹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으악! 연기, 난리 부르스가 벌어집니다.

    네. …니체는 그러한 상태가 바로, 소위 스스로 ‘정당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심리상태라고 보는 거 아닐까요?

    자, 좀 점잖고 부드러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 까요?
    “응? 왜 저모양들이지? 난, 저렇지 못하는데…난, 저런 기질이 아닌데…”
    이런 생각하게 되지요.

    80년대, ‘의식화’가 철저히 된 정치적 학생이 유창한 언변으로
    정의를 주장할 때, 기질이 온건하고 점잖은 사람이 느끼는 심정…
    그게 바로 니체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백석현
  • 이그..’정당’한게 아니라…제가 잘못 입력했습니다.
    ‘정의로운 사람들’ 혹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백석현
  • (흑. 오늘도 들려서 기어코 한 꼭지.)

    위에서 저는 ‘자기정당성에 대한 위선적 확신(도취)’에 대해 이야기 했지요.
    이게 성경 신약의 바리새(Pharasee)입니다.
    영어로는 self-righteousness, 독일어로는 Selbst-gerechtigkeit 입니다.
    니체가 짜라두짜에서 엄청나게 비판한 악덕입니다.
    한마디로, 인류를 골로 보내는 악덕이라고 비판하지요.

    그런데 이 Pharasee에서 나온 단어가 philistine입니다.(파생어입니다)
    영한 사전을 찾으면 ‘속물’로 나옵니다.
    으악!
    snob을 찾아도 ‘속물’입니다. 또 으악!

    둘은 전혀 다릅니다.
    philistine은 ‘바래새같은 넘들’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정당성에 도취한, 위선자를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위선적인, ‘지가 옳다는 생각이 대가리 끝까지 박힌 구역질 나는 놈’이라는 뜻입니다.

    snob은 지가 안 가진 걸 가진 척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졸부가 갑자기 책과 그림과 음반을 사들이면…실은 그걸 감상할 능력도 없으면서…그게 snob입니다. ‘있는 체 하는’ ‘잰 체하는’겁니다.허영이지요. 영어표현으로, 좀 잰체한 후, 씩 웃으면서 “I am all vain!”이라고 할 때 그게 바로 ‘snob질 좀 했다’는 표현입니다.

    흑. 그런데..이 philistine의 뜻을 아주 의도적으로 악질적으로 해석한 사람이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입니다. (흑…사실 이 점이 제가 마르크스에 대해 가장 싫어하는 지점입니다.) 자본1권 어디선가에 (지금은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아, 영어판과 우리말 번역본 모두 내다 버렸습니다)
    “philistine은 전제premises는 받아 들이면서 결론conclusion은 거부하는 경우’라는 뜻의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으악! 그런 경우를 두고 니체는 ‘정신의 양심이 없는 자’ ‘정신을 참회해야 하는 자’라고 합니다.니체에게 정신(Geist)은 지성, 지식, 머리에서 전개되는 무엇을 의미합니다.

    그런 경우를 두고 저는, ‘지적 정직성(intellectual intergity)가 없는 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지적 정직성이 없는 자, 즉 니체의 표현을 빌면, ‘정신의 양심이 없는 자’는 그래도 귀엽습니다. 안쓰럽지요. 누구나 가지는 약점이니까요. 저도 까고, 까면 나오지요.

    philistine은 다릅니다. 이건…흑….위선적인 자기 도취이지요. 전체주의자들, 당원들, 이념주의자들, 바리새들, 편협하고 위선적인 인종들….정말 …나쁜 넘들이지요.

    마르크스가 philistine의 본래 뜻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그것을 ‘지적 정직성이 없는 자’로 왜곡해서 떠드는 것을 보고 저는 정나미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가, 가장 지독한 전체주의체제의 비조가 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백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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