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노을이 물을 가려 비치랴 — 병산서원에서

안동으로 가는 날, 장마비 내리다.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길에 마주친 한 차례 거센 폭우, 산만한 하늘을 일거에 휩쓸어 정돈하며 북상 중이다. 안동에 접어들었을 때는 이미 폭우가 거쳐간 상태. 말갛게 씻긴 하늘에서는 빗방울 똑똑 듣고 있고, 낙동강은 황톳빛 물결이 되어 하회마을을 감아돈다. 여름의 생태가 격정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몇 마지기의 논마저 낙동강 강물에 잠겼으니 인간의 들녘과 인간의 정신도 재편되지 않을 수 없다. 하회마을로 들어서 병산서원 가는 길은 장마비에 흙이 패여 자잘한 돌들이 토돌토돌 구르는 길. 왼편은 낙동강과 병산이요 오른편은 우리가 어릴적 보았던 시골길 산야의 무심한 풍경. 화려함과 분주함이 없이 그저 고요할 뿐.

한 사람의 정신세계가 재편되는 시절에 장마비 내리고, 병산서원은 찾아오는 길손에게 연달아 연달아 병산의 흐름을 선보이고 있다. 여름날 격정적인 생태 속에서도 산도 강물도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정신세계도 유유히 흐르시라.

 

백일홍 필 무렵. 작년, 답사를 시작하면서 처음 보았던 목백일홍. 그 사라락 사라락 피는 꽃을 주목하여 대면한 지 이제 겨우 한 해. 반 평생을 무엇을 보며 살아왔던 것일까. 이제야 꽃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고, 산하에 내리는 풍우와 눈발을 씩씩하게 맞아들이며 수백 수천 년을 견뎌온 유물들을 이제야 접하기 시작하다니.

그간의 결핍된 생을 인정하고 수습하며 병산서원에 당도하니 백일홍이 병산서원 바깥을 두르고 있다. 수목 말고도 담장이 두르고 있으니, 저 안에 누가 있는지, 저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다. 그 폐쇄성의 엄격함에 더하여, 바깥에서 바라볼 때 앙천하듯 바라보아야 한다. 산야의 높낮이를 그대로 살려 누각, 동재와 서재, 강당, 사당을 각각의 규율에 따라 알맞은 자리에 앉힌 그 절도에서 엄정함을 또 엿볼 수 있다.

병산서원 진입로
병산서원 복례문에서 바라본 진입로. 복례문에 들어서자마자 강당 마루까지 시야가 확보된다.

조심스러운 듯 반쯤 열린 복례문을 통과하여 병산서원을 들어서다. 후일 지인에게 들어보니 서원을 들어설 때 정문을 통과함은 예가 아니라고 보는 분들도 계시단다. 진작 그런 줄 알았다면, 복례문으로 들어서지 아니하였으리라. 요즘 와서 그같은 예는 의미 없는 겉치레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예’는 자신을 극복함과 동시에 표출되는 그 무엇. 나를 다스리고 나를 이겨내면서, 다시 말해 내가 가진 생각과 정신을 무너뜨리고 극복해 나가면서 나 아닌 외부의 사람, 자연, 사물을 대할 때의 조심스런 자세와도 같은 것. ‘이 조심스런 자세로 복귀하라’, 복례문은 길손의 무례함마저 말없이 받아들이며 크게 가르친다.

복례문을 통과하면 주건물인 강당의 마루까지 시야가 툭 확보된다. 돌계단의 상승일로, 계단과 누마루의 중첩, 두리기둥의 수직 도열. 건축적 공간이 마련해준 이 네모난 공간에 빨려들며 길손의 시선은 강당의 대청까지 직선으로 가 닿는다. 모든 건축적 장치들은 비를 머금고 있어 그 빛깔이 진하고 차분하다. 흐트러짐 없이 어둡고 고요하다. 고요하다. 이 마음을 얻기까지 그간 어디에서 배회하였던 것인가.

 

만대루 누각 밑기둥을 매만지며 서원의 뜨락에 들어서니 아담하다. 조선 최고의 사학기관인 서원의 강학공간이 이렇게 작다니, 내 시선과 감각은 얼마나 불필요한 것들로 비대해진 것인가. 동재, 서재, 강당, 장판각 등 교육을 위한 주요 건물들 역시 초라하다 싶을 정도로 작다. 후원으로 들어서 중심건물인 강당(입교당)을 보노라면 백일홍 한두 그루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인간이 유하는 거처는 군살을 빼듯 일체의 불필요한 공간을 걷어내었다. 이러한 구조 문법이 만대루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니, 병산서원은 은연하고 단아하면서도 골격이 뚜렷하다.

후원을 서성거리고 있자니 언뜻 대나무가 사운거린다. 한껏 물을 섭취한 댓잎은 부풀어올라 빛깔마저 연하다. 그 얇고 가벼운 잎으로 사운거리는 시간, 바람은 차라락 차라락 댓잎을 흔들며 지나간다.

흔들릴지라도 곱게 흔들리시라. 뚝 꺾이듯 곡절하지 말고, 곡절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서도 대나무가 바람을 맞이하듯 곱게 흔들리시라. 청풍은 대나무밭에서 불어오고, 과연, 대나무는 사람을 선선하게 한다(竹令冷人). 이 선선한 병산서원 뒤란에서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비애를 극복한 백일홍도 그 붉음이 자잘하여 대나무처럼 소슬하다.

만대루와 낙동강
만대루 난간과 낙동강. 만대루의 헐거운 누각 기둥의 칸칸으로 낙동강이 흙빛으로 흐르고 있다.

입교당을 한 바퀴 두 바퀴 허랑하게 돌며 선조가 남긴 여운을 탐해 본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 입교당 대청에 오르니 뒤로는 들창으로 세 폭의 경치가 들어오고 앞으로는 만대루, 낙동강, 병산이 평화로운 수평선을 첩첩 그으며 흐르고 있다. 막역한 산수의 흐름에 중첩되어 안긴 만대루는 차라리 헐겁다. 입교당과 동서재의 대청이 최대한 응집된 공간이라면, 산수를 위한 건축적 공간은 이 응집된 정신을 일거에 풀어버리는 장치들이다.

풍광에 스며든 정신은, 아니 풍광이 몸에 밴 정신은, 언어적 세계의 각박함과 한계를 알고 있을 터. 헐겁게 흐르시라. 제아무리 많이 알고 있을지라도, 천 수레 만 수레의 책을 읽었을지라도, 병산처럼 위에서 아래로, 강물처럼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만대루처럼 헐겁게, 흐르고 흐르시라. 그대, 내면의 공간에서 확고부동한 판단이 섰을지라도, 산수를 대할 때는 부디 그 판단을 물리고 산수와 더불어 유려하게 흐르시라.

 

만대루(晩對樓), 저무는 시간에 뭔가를 대하는 누각. ‘對한다’는 말은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태도를 가리키고 있다. 원천적으로 폐쇄성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든 언어적 사고는, ‘대하는’ 사물을 장악하고 요리할 수 있다는 양 착각을 하기도 하지만, 사고와 사물이 만나는 최대의 근접치는 ‘대함’일 뿐이다.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하는 모든 사고는 한 편의 자작극이다. 그리하여 만대루는 산수를 제압하지 못하고 산수 앞에서 헐겁고 수척하다. 만년의 두보는 백제성루에 올라 “병풍처럼 푸른 산수는 저물녘 대할 만하다”(翠屛宜晩對)고 하였으니, ‘만대루’는 그 유구한 시정에 완벽하게 부합함으로써, 즉 풍광에 절묘하게 응하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최대한 성숙한 철학을 품고 있기도 하다.

만대루 서편
저물녘의 만대루 서편. 누마루의 실질적이고 어리숙한 선이 가을서리처럼 빛난다. 이 누마루 바닥에 건물의 핵심구조물인 두리기둥마저 허튼 그림자 되어 풀잎처럼 눕는다.

저물 무렵, 만대루에 올라본다. 오후 늦게 당도한 병산서원은 곳곳이 한껏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길손의 발길과 시선은 조용하고 차분할 수밖에 없었다. 장마비가 훑고 지나간 하늘은 말갛게 씻긴 채 간혹 빗방울을 떨어뜨릴 뿐 길손과 서원의 만남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그러나, 만대루에 올라 얼마간 산수를 응대하고 있자니, 서편 하늘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해가 스르륵 얼굴을 내민다.

빛이 든다. 누마루의 곡직(曲直)의 선, 참으로 실질적이고 어리숙한 선이 은은히 빛난다. 이 헐렁헐렁한 곡직의 누마루 바닥으로 빗살의 노을빛이 가을서리처럼 사르르 내려앉고, 그 위로 핵심구조물인 두리기둥마저 허튼 그림자 되어 풀잎처럼 눕는다.

현대 건물이 도무지 보여줄 수 없는 광경이다. 뼈대만 남기고 공간을 최대한 비워낸 누각 안으로 바람이 불고, 빛이 들고, 저물녘 맑은 산수가 길손을 응대한다. 만대루의 서편이 빛난다. 수목은 이미 물기에 젖어 있으니, 백일홍과 댓잎이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빛은 꽃잎마다 잎사귀마다 매달린 물방울을 투과하느라 천연색으로 눈부시다.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는 그토록 헐거웠고, 만대루 구조물의 선들은 이토록 헐렁한데, 지금은 주변의 모든 것을 일체 가감함이 없이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찬란하다. 폐쇄성과는 거리가 먼 만대루의 내부공간은 내부공간이라기보다는 외부의 풍광이 인간의 시선에 들어오는 통로로 구실하고 있다. 풍광과 시선 사이에는 건축물이 서 있기 위한 필수적인 구조물만이 최소한의 응대의 틀로서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 주거의 필수적 장치라고 할 만한 벽마저 바람과 빛을 위하여 확 터버렸으니, 내외부의 관입이 이토록 훤칠한 건축언어를 또 어디에서 만나랴. 또 어디에서 이 장쾌함을 보랴.

이제껏 침잠하고 있던 만대루 맞은편의 병산도 이제 노을빛을 받아 화라락 깨어난다. 병산은 강물을 따라 흘러가며 길손에게 푸른 손짓을 한다. 만대루의 기둥과 추녀도 병산과 나란히 흐르고 있다. 누각 기둥과 지붕은 산수의 흐름을 저해하기는커녕 그 유구한 근원적 흐름을 한껏 살려주고 있다. 흐름 속에서 촌음마다 천변만화하는 만대루 내외부는 모든 굳은 것들을 찰랑찰랑 흔든다. 버리라고, 이미 옛일이라고, 멈춤은 부질없다고, 이렇게 찰나에 침잠하고 찰나에 빛나면 그뿐이라고, 이 침잠과 환희를 따라 기뻐할 줄 알면 된다고,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이 기쁨을 모르면 일생 노역에서 헤어날 길 없다고. 만대루 누각 기둥 칸칸으로 들어오는 풍광과 산수는 그렇게 역설한다.

 

누마루에 비친 빛과 그림자처럼, 내 마음은 누워버린다. 한없이 헐겁고 기쁘다. 그리하여 서원에서의 강학시간은 하나의 여기餘技가 되고 이렇게 산수와 풍광을 대하는 시간이 더욱 본질적인 것이 될 만하다. 황혼빛이 길손의 마음을 흔들며 이제 저물고, 어스름이 깔릴 무렵, 병산서원을 관리하시는 서애 유성룡의 후손 분이 만대루 누하로 다가와 어수룩한 길손에게 정중히 존대한다, “정문을 닫았으니 나가실 때는 옆문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미소만 띨 뿐 더 이상의 말도 없이 발걸음 소리마저 내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신다. 마치 지금 만대루에 앉아 있는 자가 만대루의 소유주라는 양, 자신은 그 소유주의 관리인이라는 양. 그러고 보니, 만대루 바로 앞의 복례문을 닫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오직 한 순간 만대루를 점한 길손을 위하여, 그분은 조용히 문을 여닫으셨던 게다.

옆문으로 조용히 조용히 빠져나와 병산서원을 다시 한 번 본다. 순식간에 병산서원의 헐거움이 사라지고 은거의 공간이 된다. 수려하고 풍요로운 세계에 들어섰다 빠져나온 듯하다.

하회마을 노을
병산서원 빠져나오는 길의 노을. 길손을 혼란에 빠뜨리며 노을이 진창물에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현대의 교육과 학문은 전인성(全人性)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 분화된 직업군으로서의 학문은 얼마나 왜소한 것인가. 차라리 여기餘技로서의 학문이 어떠할까.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집요함과 관성에 파묻히며 나름의 경건함을 유지하기도 하겠지만, 그로 인하여 놓치게 되는 바람, 빛, 산, 강물, 나무, 꽃은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가르치는 원만하고 헐거운 언어는 어찌할 것인가. 정신의 가파른 세계와 풍광의 숨결같은 세계가 서로 소통되지 못하는 현대에서 병산서원을 드나드는 일은 차라리 괴롭고 허탈하다.

병산서원 빠져나오는 길. 길손을 혼란에 빠뜨리며 노을이 진창물에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대, 이 아름다운 길을 두고 어디로 가려는가. 이 분별이 없는 충실한 세계를 버리고 어느 편견의 세계로 들어서려는가. 무슨 허위적인 정신세계로 들어서려는가.

물을 가리지 않고, 수면의 흐름을 한 치도 건드림이 없이, 노을은 진창물에서 빛나고 있지만, 인간의 정신적 활동은 온갖 것을 그저 분별하고 장악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따름이다. 현대에 올수록 인간의 정신적 활동은 더욱 더 집요하고 협소해졌을 따름이니, 확신하건대, 현대의 정신적 역량과 문화는 퇴보하고 있다.
 

인간사 흐름이 그러하다만, 그러나, 어찌 노을이 물을 가려 비치랴. [2004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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