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흐르는 밤에

마가다의 왕 아자따삿뚜 웨데히뿟따는 “출가생활의 결실”에 관한 강한 궁금증이 있었다. 세상에는 여러 분야의 직업이 있다. 이들 직업은 하나같이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것으로서, 그 결실은 지금 여기에서 당장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요리사는 음식을 만드는 기술로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며, 이발사는 머리를 깎는 기술로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린다. 이 얼마나 분명한 결실인가? 그런데, 출가생활은 과연 이런 결실이 있을까? 이것이 마가다 왕의 궁금증이었다. 그는 유명한 사문이나 바라문을 대면할 때마다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생활의 결실을 천명하실 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매번 던졌으므로, 이 궁금증은 그로서는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상념이 아니라 대단히 근본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가다 왕은 왜 그런 의문을 가졌을까? 밥벌이를 하지 않고 밥빌어 먹으며 수행하는 자들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해서? 그것은 전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 수행자가 동문서답을 할지라도, “어찌 나 같은 왕이 나의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사문이나 바라문을 경시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언제나 출가자 혹은 수행자들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었다. 그는 출가자 앞에서 “어찌 나 같은 왕이 …” 하는 마음가짐을 가진 왕이었다. 그만큼 그의 의문은 절실한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겸허한 자세를 가지고 명성이 자자한 여러 수행자들을 방문하여 “출가생활의 결실”에 관하여 질문을 던졌지만 끝내 그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마가다 왕이 오른 궁궐 누각에 달빛이 흐뭇이 흘렀다. 그는 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밤을 이겨내지 못하고 감흥을 흘렸다:

달빛 교교한 밤은 참으로 즐겁도다. 달빛 교교한 밤은 참으로 멋지도다. 달빛 교교한 밤은 참으로 편안하도다. 달빛 교교한 밤은 참으로 상서롭도다. 오늘 같은 밤에 참으로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친견하면 마음에 깨끗한 믿음이 생길까?[1]

그는 달빛이 세상의 만물 위로 흐르던 밤에 수행자를 친견하고 싶었고, 평소 궁금해하던 질문을 던져 해결하고 싶었고, 그래서 마음에 깨끗한 믿음을 갖고 싶었다. «디가니까야»의 <사문과경>은 바로 이 달빛 흐르는 밤의 감흥과 함께 시작된다.

여러 대신들이 저마다 마가다 왕의 감흥에 답하여 여러 사문, 바라문을 추천하지만 왕은 이미 그들을 친견했던 터, 그저 침묵으로 응대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한 대신 역시 침묵하고 있었고, 침묵하던 왕은 침묵하던 대신에게 왜 침묵하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부처님에 관한 소개가 그 대신의 침묵을 타고 흘러나온다: “폐하,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 지금 1250분의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저의 망고 숲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분 세존께서는 …”

바야흐로 마가다 왕이 여타 사문이나 바라문과는 다른 부처님을 친견할 때가 무르익은 것이다.

 

1250명의 많은 비구들이 머물러 있는 숲은 기침소리, 아니 헛기침소리조차 없다. 인기척이 전혀 없어 숲이 무섭게 여겨질 정도이다. 마침내 세존과 비구 승가가 마주보고 앉아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선 마가다 왕은 그 적묵함에 압도당한 탓인지 침묵에 침묵을 거듭하다가, “호수처럼 맑은 비구 승가”를 둘러보고 좀전에 달빛 흐르던 풍경을 보았을 때처럼 감흥을 이겨내지 못하고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필생의 화두처럼 간직하고 있던 질문을 던진다. 다름아닌 “출가생활의 결실”에 관하여:

세존이시여,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술 분야들이 있습니다. 즉 꼬끼리몰이꾼, 말몰이꾼, 전차병, 궁수, 기수, 군대참모, 보급병, 고위관리, 왕자, 정찰병, 영웅, 용사, 동체갑옷 입은 자, 하인의 아들, 요리사, 이발사, 목욕 보조사, 제과인, 정원사, 염색인, 직공, 바구니 만드는 자, 항아리 만드는 자, 경리인, 반지 만드는 자, 그 외에 여러 가지 기술 분야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술의 결실은 지금 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으며 그들은 그런 결실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부모를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처자식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친구와 동료를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며, 사문·바라문들에게 많은 보시를 합니다. 그러한 보시는 고귀한 결말을 가져다주고 신성한 결말을 가져다주며 행복을 익게 하고 천상에 태어나게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생활의 결실을 천명하실 수 있습니까?[2]

이 질문은 숫타니파타의 <까씨 바라드와자의 경>의 내용과 유사한 면이 있다. 바라문 까씨 바라드와자는 바라문의 농토에서 파종하는 인부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마침 세존께서도 탁발을 하려고 (쉽게 말해서, 밥빌어 먹으려고) 그 인부들 곁에 섰다. 그러자 까씨 바라드와자는 평소의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말한다: “수행자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먹습니다. 그대 수행자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드십시오.”[3]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으면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까씨 바라드와자의 날카로운 발언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생활의 면면을 밭갈고 씨뿌리고 추수하는 과정으로 하나하나 비유하여 설명한다. 이 비유 속에서 수행생활의 엄혹함은 농부의 노동생활의 혹독함을 뛰어넘는다. 이를테면, “마음을 가다듬는 것”(마음챙김)은 “쟁기날과 몰이막대”로 비유되며, “진실”은 “낫”으로 비유된다. 한 순간도 방일하지 않는 수행의 과정을 이 비유를 통해 생생하게 알게 된 까씨 바라드와자는 마침내 “당신은 진실로 밭을 가는 분”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러나, 마가다 왕의 질문은 까씨 바라드와자의 날카로운 발언과는 맥락을 달리한다. 까씨 바라드와자의 발언이 밥벌이를 하지 않는 수행자는 밥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에 촛점을 두었다면, 마가다 왕의 질문은 진실로 “출가생활의 결실”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던진 것이었다. 수행자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던 마가다 왕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는 밥벌이가 아닌 정신적 생활은 허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위기를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출가자에 버금가게 몸과 마음을 단속하고 싶은 비원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제 부처님은 마가다 왕의 절실한 질문에 답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내용이 <사문과경>의 본 내용을 이룬다.

 

“출가생활의 결실”에 대한 답으로 설해진 내용은 23가지로 정리된 계정혜 삼학의 정형구이다. 이 정형구는 불교의 핵심적인 내용이므로 나는 여기에 대해 해설할 처지가 아니다. 해설은커녕 이해하지도 못한다. 이것은 인식을 통해, 절집용어로 말하자면, “알음알이”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학자인 나는 <사문과경>의 요체는 전혀 건드리지 못하겠고, 다만 부처님께서 이 계정혜 삼학의 정형구를 설하기에 앞서 좀더 쉬운 예를 들어 마가다 왕에게 설명한 대목을 주목하고 싶다.

출가생활의 첫 번째 결실이 바로 그 대목이다. 부처님은 묻는다. 마가다 왕의 신하였던 자가 출가를 하여 몸과 마음을 단속하는 수행자가 되었다면 그 수행자를 다시 신하로 불러들일 것이냐고. 이에 마가다 왕은 답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에게 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영접하고] 자리에 앉기를 권하고 의복과 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마련하여 그를 초대하고 그를 법답게 살피고 보호를 해드릴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있는 출가생활의 결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4]

수행자를 대하는 왕의 자세가 다시 한번 놀랍기도 하지만, 부처님의 답은 더 놀랍다. 부처님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 자체를 하나의 결실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해, 출가자가 됨으로써 평소에 나누던 인사 내용이 달라졌다면, 그것이 바로 출가생활의 결실이다. 이 결실은 지금 당장 여기에서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답에서 나는 망치에 얻어맞기라도 한듯 한동안 멍했다.

항상 나는 정신적 내용은 밥벌이 같은 결실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생각해왔다. 항상 나는 밥벌이를 하는 모든 분들에 대하여 위대하다고 생각하였으나 나에 대해서만큼은 사람노릇 못한다고 여겼다. 나는 밥이 떨어질 때쯤에만 밥벌이를 하고 나머지는 밥벌이를 벗어나는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콤플렉스가 오랜동안 나를 지배했고, 그래서 내 정신적 생활은 풍요롭지 못했다. 이러한 콤플렉스가 있는 한 방일하지 않고 정신생활을 하기는 힘들다. 필연적으로 나태함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문과경>은 내게 말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곧 밥벌이와 동일한 결실이라고 한다.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있는 출가생활의 결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반문은, 내가 폄하하고 있는 나의 정신성에 대하여 더는 폄하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 어쩌면 나는 나를 괄시하는 불균형의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그 불균형은 고쳐야 한다. 그러면 방일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며칠 여행을 떠난다. 남도로. 달빛 흐르는 밤에 깨끗한 믿음을 갖길 원했던 마가다 왕의 감흥이 밀려온다. 나는 이 여행 중에 무수히 많은 고마운 분들을 생각할 것이다.

  1. 각묵스님 번역, «디가니까야»의 <사문과경> 188면 []
  2. 각묵스님 번역, «디가니까야» 195-196면 []
  3. 전재성 번역, «숫타니파타» 102면 []
  4. 각묵스님 번역, «디가니까야» 218면 []

달빛 흐르는 밤에”에 대한 2개의 댓글

  • 남도로의 여행은 좋으셨는지요. 인용문이 제 모니터로는 깨져서 볼 수 없지만, 나머지 글만으로도 참 좋습니다. 본래 일요일 오후에는 불교세미나를 했었는데, 잠시 쉬고 있습니다. 밀린 일들 때문에 그랬던 것인데,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도 몸과 마음은 더욱 게을러져서 괴로와하던 참이었습니다. 제게 고싱가님의 결실은 이렇게 다가 옵니다. 글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다른 세상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흑백 사진들은 매우 귀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그 사진들을 모아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볼 수 있는 때가 오리라 저는 믿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에움길
  • ‘불교세미나’라는 것도 있군요. 그러고보니 종교적인 가르침은 제게 언제나 혼자 하는 명상이나 음미의 대상이었지 ‘세미나’를 해본 적이 없군요. 매우 신선하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인용문이 깨져보이다니 미안합니다. 워낙 컴퓨터마다 사정이 다르니 원인을 잘 모르겠지만, 원인으로 추정되는 지점을 수정해서 이제는 잘 보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항상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싱가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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