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해의 그물

부처님께서 길게 설한 경을 모아놓은 경전인 «디가니까야»(장아함경)의 첫 경은 <범망경>이다. ‘범천의 그물’, ‘견해의 그물’이라는 뜻을 가진 이 첫 번째 경은 부처님을 비난하는 유행승 숩삐야와 부처님을 칭송하는 숩삐야 제자 브라흐마닷따의 대위법적인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그 둘은 부처님을 비난하고 칭송하면서 부처님과 비구 승가를 계속해서 뒤따라갔으므로, 비난과 칭송이 마치 탄현 이후의 울림처럼 세존과 비구 승가의 뒤로 지속적으로 울렸다. 세존과 비구 승가가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그들도 객사에 머물렀고 비난과 칭송의 울림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비구들이 모여 그 둘의 비난과 칭송이 경이롭게 지속적으로 따라오고 있음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때 비구들이 모인 곳으로 부처님이 오셨다: “비구들이여,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 모였는가? 그리고 그대들이 하다만 이야기는 무엇인가?”
 

비구들은 부처님의 질문에 답하여 숩삐야의 비난과 브라흐마닷따의 칭송에 대하여 사뢰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남들의 비방에 대하여 분노하지도 말고 싫어하지도 말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또, 남들의 칭송에 대해서도 즐거워하거나 자랑스럽게 여기지 말라고 가르친다. 범부의 칭송은 어느 하나에 국한하여 하는 칭송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범부는 여래 혹은 수행자가 계들을 잘 지킨다며 칭송한다. 그런데 범부들이 칭송하는 그 계들은 어떤 내용인가? 불교경전 곳곳에서 정형구로 되풀이되어 등장하는 ‘짧은 길이의 계’, ‘중간 길이의 계’, ‘긴 길이의 계’가 그리하여 범부의 칭송의 내용으로 편입되어 소개된다. 불교전통에서 유구하게 전승되고 있는 계들이 범부의 입에 실려 전해짐으로써 이 계들은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무너질 구조를 안게 된다. 적어도 이 <범망경> 안에서는 그렇다.

계들을 잘 지킨다는 범부의 칭송은 공허하다. 이것은 여래를 있는 그대로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여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진정한 법들을 보지 못한 범부의 흠결 투성이 칭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법들을 본 후에야 여래를 있는 그대로 칭송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이 바로 <범망경>의 본론을 구성한다. 숩삐야의 부처님 비난과 브라흐마닷따의 부처님 칭송과 함께 시작된 <범망경>은, 이제, 비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주의하지 않고 오직 칭송만을 문제 삼게 되었고, 이것을 실마리로 여래를 제대로 칭송할 수 있는 자의 자격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런데, <범망경> 본론의 구성이 흥미롭다. 부처님은 과거를 탐구하는 자들의 18가지 견해와 미래를 탐구하는 자들의 44가지 견해들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이 견해들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철학적인 질문들을 망라한다. 그리고 이 견해들을 일일이 소개하는 내용이 <범망경> 대부분을 차지한다. 다만, 이 견해들의 소개가 일단락 될 때마다 (갖가지 견해들의 소개 분량에 비하면) 참으로 간단한 정형구가 되풀이될 뿐이다. 이 정형구가 바로 <범망경>의 핵심이자 결론이며, 물음에 대한 답이다. 이 정형구의 내용은 이렇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취하고 이와 같이 거머쥔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딘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 여래는 이것을 꿰뚫어 알고 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안다. [이것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알지만 [갈애와 견해와 자만으로]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한 평화를 분명하게 안다.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안 뒤 여래는 취착없이 해탈한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런 법들이야말로 심오하고, 보기도 힘들고, 깨닫기도 힘들고, 평화롭고 숭고하며,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며,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으며, 이것은 여래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낸 것이다. [사람들이 만약 이러한 법들을 보고나서] 여래를 있는 그대로 칭송한다면 그제야 그들은 참으로 바르게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

이렇게, <범망경>은 결국에는 무너질 내용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내용들을 무너뜨리고서 등장하는 간단한 두 문단의 정형구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점에서 <범망경>은, 마치 갖가지 성부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난만히 전개되다가 어느 순간 그것들이 모두 무너지고 정선율만 살아남는 대위법의 음악을 닮았다. 불교경전은 음악처럼 읽어야 한다. 그것은 합송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단이 있고 운율이 있는 말이며(글이 아니다!), 시간을 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비구들은 이 <범망경>을 암송할 때 무너질 음악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공들여 할애하게 된다. 그 무너질 음악은 다름아닌 영원의 문제, 유한과 무한의 문제, 우연과 필연의 문제, 회의론의 문제, 자아의 문제, 사후의 문제 등등, 인류역사에서 일급으로 다루어진 형이상학적 문제들로 엮어져 있다. 이러한 일급의 철학적 질문과 답변들이 내내 암송되다가 어느 짧은 순간 그것들이 무위로 돌아가고 위의 두 문단짜리 정형구가 일순 입에 오르는 것이다. 이 짧은 정형구를 입에 올릴 때, 아니 노래할 때, 그때 비구의 심경은 어떤 것일까? 그 정형구는 잘게 부숴진 잡석 무더기 속에서 금강처럼 빛나지 않았을까?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취하고 이와 같이 거머쥔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딘지, 다음 생에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

62가지 견해,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한 인간의 온갖 견해가 그룹별로 길게 소개된 뒤에는 어김없이 위의 금강같은 선율이 강렬한 인상과 함께 등장한다. 이 선율이 등장할 때 인간의 갖가지 견해들은 하나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 견해들은 마치 그물과도 같다. 견해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어서 그물이 아니라, 모든 견해는 저마다 하나의 그물이다. 견해를 표출함과 동시에 그 견해에 걸리는 구조, 마치 그물에 걸리듯 걸리는 인간의 의식구조는 이렇게 설명이 된다. 각묵스님은 이러한 구조의 분석을 두고, “<범망경>이야말로 다양한 견해를 표출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견해의 노예로 전락해가는 인류에게 던지시는 부처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2]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범망경>의 핵심 정형구는, 견해의 그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 그물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견해의 그물에 걸린 자들의 생을 눈앞에 생생하게 제시함으로서 견해의 위험성과 허상성을 보여준다. 먼저, 그들의 생사, 그들의 윤회를 눈앞에 제시한다. 다시 말해, 여래는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 인도될 곳”을 꿰뚫어 안다. 그들은 견해라는 폐쇄적인 순환원에 갇혀 일생을 맴돈다. 이처럼 대부분의 인간은 견해라는 하나의 순환원 안에서 맴돌며 일생을 마치지만, 사실 그 순환원은 하나의 미망, 일어났다 사라지는 하나의 느낌일 뿐이다. 여래는 그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분명하게 안다. 인간의 인식은 하나의 감각작용에 불과할 뿐이라는 불교의 위대한 통찰이 여기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견해는 하나의 허상이면서도 하나의 위험이다. 이 견해라는 그물을 꿰뚫어 알고, 이 견해라는 그물을 넘어선 것도 꿰뚫어 알고, 꿰뚫어 알면서도 꿰뚫어 안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견해라는 하나의 느낌이 일어났다 사라짐을 분명하게 알고서 취착없이 해탈한 자가 있다면, 바로 그 자가 여래를 있는 그대로 칭송할 수 있는 자다. 그 이외의 자들이 칭송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칭송이나 비난은 견해의 그물에 걸린 자들, 어부인 동시에 물고기인 자들의 모순으로 가득 찬 칭송이나 비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칭송이나 비난은 그물에 걸린 채 비상하려는 물고기들의 아우성과도 같다.

비구들이여, 과거를 모색하고 미래를 모색하고 과거와 미래를 모색하며,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를 단언하는 사문·바라문들은 모두 이 62가지의 그물에 걸린 것이다. 그들은 위로 오르고자 하나 그물에 걸린 채 오르게 된다. 그들은 참으로 그물에 완전히 갇혀서 오를 뿐이다.[3]

이렇게 하여, 과거와 미래에 대한 형이상학적 견해들이 모두 무너지고, 그 견해에 걸린 자들의 생애도 무너지고, 그들의 칭송과 비난도 무너진다. 그들의 칭송에 실려 전해지는 계들도 무너진다. 오직 남은 것은, “심오하고, 보기도 힘들고, 깨닫기도 힘들고, 평화롭고 숭고하며,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며,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으며, 여래가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낸 것”뿐이다.

  1. 각묵스님 역, «디가니까야» 1, <범망경> 여러 곳 []
  2. 각묵스님 역, «디가니까야» 1, 58면 []
  3. 각묵스님 역, «디가니까야» 1, 178면 []

견해의 그물”에 대한 4개의 댓글

  • 심오한 말씀을 사유할 수 있을만큼 회복중이겠지요? 반가운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강물
  • 감사합니다. 많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많이 덜었으니 모든 것을 홀가분하게 시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고싱가숲
  • 네, 반갑습니다. 제 글은 소개에서 안내해 드린 대로 옮겨가실 수 있습니다. _()_

    고싱가
  • 안녕하십니까 저는 네이버에서 nelect라는 이름으로 블로그를 가지고 있는 불자입니다. 법우님의 견해의 그물이라는 글을 읽고, 크게 감동받아 제 블로그에 담아가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법우님의 고견이 많은 분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블로그는 http://blog.naver.com/nelect 입니다. 법우님의 몸과 마음이 괴로움없고 행복하고 평온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나무석가모니불. 합장.

    nel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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