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제5장

이제 우리 탐구의 원래 목표, 즉 디오뉘소스-아폴론적 천재와 그 예술작품의 인식을 겨냥하고 있는, 적어도 저 통합 신비의식에 대한 예감어린 이해를 겨냥하고 있는 목표에 근접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먼저 묻는다. 훗날 비극과 극화된 디튀람보스로 발전하게 되는 새로운 싹이 헬라스 세계에서 처음으로 눈에 띄었던 지점은 어디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고대가 직접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해명을 던져 준다. 고대는 오로지 호메로스와 아르킬로코스[1]만이 본래의 자연—이 자연에서 나온 하나의 불길이 전체 그리스 후대로 번져나간다—과 전적으로 동일한 자로 평가될 수 있다고 확실하게 지각하고서 그리스 시문학의 시조이자 횃불을 든 자로서 그 두 사람을 조각작품, 보석 등에 나란히 모셨던 것이다. 호메로스, 제 안으로 침잠하는 백발의 몽상가, 아폴론적인 소박 예술가의 전형은, 거칠게 현존을 관통하여 휘몰아간, 무사 여신의 전사같은 시종 아르킬로코스의 격정적인 두상頭像을 이제 놀라워하며 바라본다: 그러나 후대의 미학은 이를 해명한답시고 고작해야 “객관적”인 예술가에 대항하여 최초의 “주관적”인 예술가가 등장하였다[2]는 식으로 부언할 줄밖에 몰랐다. 이 해석은 우리에게 거의 쓸모가 없다. 우리는 주관적인 예술가를 그저 형편없는 예술가로 알고 있으며, 우리는 모든 종류와 모든 수준의 예술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주관적인 것을 극복하라고, “나”로부터 벗어나라고, 개인 각자의 의지와 욕망을 침묵시키라고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객관성이 없다면, 사심없는 순수한 관조[3]가 없다면, 최소한의 참된 예술가적 창작도 있을 수 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미학은 어떻게 “서정시인”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 서정시인은, 모든 시대의 경험에 의하면, 언제나 “나”를 말하며 제자신의 격정과 욕망의 반음계 전체를 우리 앞에서 노래한다. 바로 이 아르킬로코스가, 호메로스 옆에서, 증오와 멸시의 고성高聲을 통하여, 욕구의 취기서린 분출을 통하여,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다; 그는, 최초의 주관적 예술가라고 불리는 그는, 이 때문에 진짜 비예술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런데도, 다름아닌 델포이의 신탁조차, “객관적”인 예술의 그 진원지조차 참으로 진기한 신탁을 내려 그에게, 그 시인에게 존경을 바치다니, 이 어인 일인가?[4]

실러는 자신의 시를 창작하는 과정과 관련하여, 그 자신에게조차 해명이 안되는데도 별 생각없이 드러낸 심리적인 관찰을 통하여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을 던져준다; 그러니까 그는 고백하기를, 시창작 활동의 예비적인 상태로서, 가령 인과에 맞게 사고가 정돈된 일련의 영상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음악적인 분위기(“내게서 그 느낌은 처음에는 명확하고 분명한 대상이 없습니다. 이 대상은 뒤늦게야 형성됩니다. 뭔가 음악적인 정서의 분위기가 먼저 있고, 그 뒤를 잇는 것이 비로소 시적인 이념입니다”[5])가 자기 앞에 그리고 자기 안에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전체 고대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현상, 어느 곳에서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서정시인음악가의 합일, 즉 동일성—이에 비하면 우리의 후대 서정시는 두상 없는 신상과도 같아 보인다—을 납득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조금 앞서 우리가 서술한 미적 형이상학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정시인을 해명할 수 있다. 음악이 세계의 반복이요 세계의 제2의 주물이라고 명명함이 옳다면, 서정시인은 먼저 디오뉘소스적인 예술가로서 원초의 일자, 그 고통, 그 모순과 전적으로 하나가 되고 나서, 그 원초 일자의 모사를 음악으로 창작한다; 그러나 이제 이 음악이, 아폴론적인 꿈의 영향 아래에서, 흡사 한 폭의 비유적인 꿈의 영상처럼 그에게 보인다. 원초 고통을 반영하는, 음악 속에서 떠오르는, 영상도 없고 개념도 없는 저 반영은, 이제 유일무이한 비유나 본보기로서 제2의 거울상을 내놓는다. 그 예술가는 자신의 주관성을 이미 디오뉘소스적인 과정에서 내려놓았다: 그와 세계 심장과의 합일을 그에게 비춰주는 영상은, 저 원초 모순과 원초 고통은 물론 가상에의 원초 욕망까지 통틀어 육화시키는 한 바탕 꿈의 장면이다. 서정시인의 “나”는 그러므로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울려나오는 것이다: 후대 미학자들이 말하는 의미의 서정시인의 “주관성”이라 함은 하나의 상상이다. 그리스인들 중 최초의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가 뤼캄베스의 딸들에게 미칠 듯한 사랑과 경멸을 동시에 전하는 경우, 그것은 우리 앞에서 열광적으로 흥분하며 춤추는 그의 격정이 아니다: 우리는 디오뉘소스와 마이나데스를 보고 있다, 우리는 도취된 열광자 아르킬로코스가 잠든 모습을 보고 있다—에우리피데스가 <박코스의 여신도들>[6]에서 우리에게 묘사해 주다시피, 정오의 태양 아래 알프스 고원에서의 잠—: 그리고 지금 아폴론이 그에게 다가와 월계수로 그를 어루만진다. 잠든 자의 디오뉘소스적-음악적 마력이 지금 마치 영상의 불꽃처럼 주위로 튀고 있다, 서정시가, 최고도로 펼쳐지면 비극과 극화된 디튀람보스로 불리게 될 시가 튀고 있다.

조각가 및 그와 친화성이 있는 서사시인은 영상들의 순수한 관조에 잠겨든다. 디오뉘소스적인 음악가는 어떠한 영상도 없이 제자신이 다만 오롯이 그 영상의 원초 고통이자 원초 반향反響일 뿐이다. 서정적인 천재는 신비로운 자가방기와 합일의 상태에서, 저 조각가와 서사시인의 세계와는 전적으로 다른 색채, 인과, 속도를 지니고 있는 영상세계와 비유세계가 움틈을 느낀다. 조각가와 서사시인은 이 영상들 속에서, 아니 오직 이 영상들 속에서만 즐겁고 쾌활하게 살면서 지치지 않고 그 영상들의 지극히 사소한 윤곽까지 애정을 품고 관조하는 반면에, 분노하는 아킬레우스의 영상 자체가 그로서는 그저 한 폭의 영상—이 영상을 통한 분노의 표현을 그는 가상을 향한 저 꿈의 욕망을 가지고 향유한다—에 불과한 반면에, 그리하여 그 가상의 거울을 써서 그의 형상과 하나가 되거나 융화됨에 맞서 방어하는 반면에, 그와 반대로, 서정시인의 영상들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며 오직 자신에 관한 다양한 객관물과도 같다, 그는 저 세계의 움직이는 중심으로서 “나”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나됨은 깨어있는 경험적-실재적 인간의 나됨이 아니라, 오히려 무릇 유일무이하게 진정으로 존재하며 영원한, 사물들의 근저에서 쉬고 있는 나됨이다. 서정적인 천재는 이 나됨의 모사물들을 통하여 사물들의 저 근저까지 꿰뚫어본다. 이제 우리는, 어떤 식으로 그가 모사물들 속에서 자기 자신조차 비천재로, 즉 그의 “주관”으로 목도하는가를, 자신에게 실재적으로 여겨지는 어느 특정한 사물을 겨냥하고 있는 주관적인 정열과 의지적인 움직임의 총체적인 군집으로 목도하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지금 흡사 서정적인 천재와 그와 결합된 비천재가 하나라도 되는 듯 비친다면, 그리고 그 천재가 자기 자신에 관하여 저 짧은 낱말 “나”를 말하기라도 하는 듯 비친다면, 지금 이 가상이 서정시인을 주관적인 시인이라고 지적했던 자들을 오도하듯 더 이상 우리를 오도하지는 못하리라. 진실로, 정열적으로 타오르고, 사랑하고, 증오하는 인간 아르킬로코스는, 이미 더 이상 아르킬로코스가 아닌 세계천재의 한 바탕 환영일 따름이며, 그의 원초 고통은 인간 아르킬로코스라는 저 비유로 상징적으로 발설된다: 반면에 저 주관적으로 의지하고 욕망하는 인간 아르킬로코스는 뭇 단 한 순간도 시인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서정시인은 다름아닌 제 앞에 있는 인간 아르킬로코스의 현상만을 영원한 존재의 재현Wiederschein으로 볼 필요는 전혀 없다; 그리고 비극은 서정시인의 환영세계가 저 선구적으로 서 있는 현상Phänomen으로부터 어느 정도나 멀리 떨어질 수 있는가를 입증하고 있다.

서정시인이 철학적 예술관에 선사한 어려움을 숨기지 않았던 쇼펜하우어가 하나의 활로를 발견했다고 믿고 있으며 나야 그 길을 동행할 수는 없지만, 저 어려움을 결정적으로 제거할 수도 있었던 수단만큼은, 음악에 대한 그의 심오한 형이상학에, 오직 그의 수중에만 제시되었다: 내가 그의 정신을 좇아 그를 존중하는 가운데 그걸 여기에서 해냈다고 믿는다. 나와는 반대로, 그는 가곡의 특유한 본질을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한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집 295면[7]): “노래하는 자의 의식을 채우는 것은 의지의 주관, 즉 고유의 의욕으로서, 빈번하게는 분출되는 만족스러운 의욕(기쁨)이며, 아마도 더 빈번하게는 가로막히는 의욕(슬픔)일 것이며, 언제나 감정, 정열, 감동어린 정서상태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들 이외에 또한 노래하는 자는 주위를 두르고 있는 자연의 광경을 통하여 순수하고 무의지적인 인식—이 인식의 미동도 없는 복된 휴식은 이제부터 항상 제한된, 항상 좀더 갈급한 의욕의 격류와 대비를 이룬다—의 주체로서 제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이 대비의 느낌은, 갈마듦의 유희는, 원래 가곡 전체에서 발언되는 것, 뭇 서정적인 상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순수한 인식같은 것이 의욕과 그 격류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뒤따른다; 하지만 오직 순간일 뿐이다: 의욕은, 우리의 개인적인 목적에 대한 회상은, 고요한 관망으로부터 언제나 새록새록 우리를 빼낸다; 그러나 또한 되풀이하여, 순수한 무의지적인 인식이 마련된 곳, 바로 옆에 있는 아름다운 환경이 우리를 그 의욕에서 꾀어낸다. 따라서 가곡과 서정적인 분위기에서는 ‘의욕’(목적에 대한 개인적 관심)과 ‘이미 제공되어 있는 환경의 순수한 관조’가 놀랍게도 서로서로 갈마든다: 이 둘 사이의 관계들이 추구되고 상상된다; 주관적인 분위기, 의지의 흥분은 관조된 환경에 제 색조를 비추어 알리며 후자는 전자에 제 색조를 비추어 알린다: 진정한 가곡은 이처럼 전적으로 혼화되고 분리된 이 정서상태의 인쇄이다.”

이 서술을 읽고서, 여기에서 불완전하게 달성되는 예술, 말하자면 뜀뛰기하느라 겨우겨우 목표에 다다르는 예술, 그렇다, 의욕과 순수한 관조, 즉 비미적인 상태와 미적인 상태의 기이한 혼합을 본질로 한다는 절반의 예술을 서정시의 특징으로 잡고 있음을 어느 누가 오인할 수 있겠는가? 정작 우리는 주장한다, 의욕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을 권하는 개체로서의 주체는 다만 적대자에 불과하며 예술의 근원으로 생각될 수 없기 때문에, 쇼펜하우어조차 무슨 가치척도라도 되는 듯 예술들을 나누는 기준으로 삼은 대립 전반, 즉 주관과 객관의 대립 전반이 무릇 미학에 적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러나 주체가 예술가인 한, 그 주체는 이미 자신의 개인적인 의지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진정으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주체가 가상 속에서의 자신의 구원을 경축하도록 매개하는 매개같은 것이 된다. 이는 무엇보다도, 예술희극 전반이 결코 우리를 위해서, 가령 우리의 개선과 교육 때문에 상연되지는 않는다는 점, 그렇다, 우리가 저 예술세계 본연의 창조자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가 비천하게 되면서도 고귀하게 되도록, 우리에게 분명하게 밝혀 준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두고, 그 예술작품의 진정한 창조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확실히 우리가 영상들이요 예술가의 투영들이며, 우리의 지고한 품위는 예술작품의 의미 속에 있다고 받아들여도 무방하리라—현존과 세계는 오직 미적인 현상Phänomen으로서만 영원히 정당화되기 때문이다[8]:—반면에 이 의미에 관한 우리의 의식은, 화폭에 그려진 전사가 화폭에 묘사된 전투에 관하여 가지는 의식과 거의 다를 바 없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우리의 모든 예술지식은 완연히 허상虛像같은 지식이다. 지자로서의 우리는, 저 예술희극의 유일무이한 창조자요 관객으로서 한 바탕 영원한 향유를 준비하고 있는 본질과 하나도 아니며 동일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직 천재만이 예술가의 창작 활동에서 세계의 원초 예술가와 융화되는 한에서 예술의 영원한 본질에 대하여 뭔가를 알고 있을 뿐이다; 저 상태에서의 그는, 기이하게도, 눈동자를 휘휘 돌려 제 자신을 관조할 수 있는, 동화 속의 섬뜩한 모습과도 같다; 지금 그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이며, 동시에 시인이자 배우이자 관객이다.

  1. 기원전 680-640년경의 그리스 서정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약 100여 수의 토막글로 인용되어 현존한다. 그는 서사시의 운율을 발전시켜 이행시 형식을 창안하기도 하였다. 그의 서정시는 거의 개인적인 체험만을 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감정의 표현에 집중되어 있다. 후대 서정시에 끼친 그의 영향은 서사시에 끼친 호메로스의 영향과 비견할 만하다. []
  2. 니체는 헤겔의 «미학»을 빗대어 말하고 있다. 이 저서에서 헤겔은 서사시의 객관적인 예술가와 서정시의 주관적인 예술가를 대립시키고 있다: 서사시에서는 “객관적인 것 자체가 그것의 객관성에서 나오지만”, 서정시의 내용은 “주관적인 것, 내적인 세계, [뭔가를] 주시하고 느끼는 정서이다”. []
  3. 칸트와 쇼펜하우어는 미적 경험을 ‘사심없는 관조’의 경험이라고 정의한다. 이에 대해서는 «도덕의 계보»의 세번째 에세이, <금욕주의적 이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6장을 참고하라. []
  4. 아마도 플루타르코스의 De sera numinis vindicatione 17에서 보고된 이야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보고에 따르면, 아폴론의 사제가 ‘무사 여신의 성스러운 사람’을 죽였다는 이유에서 아르킬로코스의 살해자를 신전에서 내쫓았다고 한다. []
  5. 1796년 3월 18일, 괴테에게 보낸 편지 []
  6. 677행 이하:

    태양이 대지를 데우기 위하여 빛을 쏟아붓고 있었을 때, 풀을 뜯는 소떼가 산등성이를 향하여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세 패의 춤추는 여인들을 보았는데, (…) 그들은 모두 사지를 뻗고 자고 있었습니다. 더러는 전나무 가지들에 등을 기대고 있었고, 더러는 땅바닥을 베고 참나무 잎사귀들 속에서 쓰러져 자고 있었는데, 다들 얌전했고, 전하의 말씀처럼 포도주와 피리소리에 취하여 사랑을 찾아 숲속 한적한 곳을 쏘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이 대목은 디오뉘소스를 경시하는 왕 펜테우스가 디오뉘소스 시녀들인 마이나데스들이 은신하고 있는 곳을 알아오라는 명에 따라 그곳을 염탐하고 온 사자가 왕에게 보고하는 장면이다. 문란한 성관계, 폭력적인 가축 살해, 미친 듯한 행패로 익히 알려진 마이나데스들이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숲속 고원에서 가장 평온한 낮잠을 자고 있다. 물론, 이 평온한 잠에서 깨어난 마이나데스들은 펜테우스 왕을 찢어 죽인다. []

  7. 제1집 3권51장 []
  8. ‘미적 현상으로서의 현존의 정당화’는 니체의 아티스트 형이상학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이를 더 상세하게 살펴보려면 «비극의 탄생» 24장, <그리스 비극시대의 철학> 7~9장을 참고하라. []

«비극의 탄생» 제5장”에 대한 1개의 댓글

  • 1.
    Er ist zuerst, als dionysischer Künstler, gänzlich mit dem Ur-Einen, seinem Schmerz und Widerspruch, eins geworden und producirt das Abbild dieses Ur-Einen als Musik

    강대경 :: 그는 우선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로서 근원적 한 사람, 근원적 한 사람의 고통 및 모순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이 근원적 한 사람의 모상을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이진우 :: 그는 우선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로서 근원적 일자, 그리고 그의 고통 및 모순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이 근원적 일자의 모상을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 강대경 번역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진우의 번역처럼 “근원적 일자”나 “원초 일자”로 옮겨야 할 것을 강대경은 “근원적 한 사람”이라고 옮겨 의미를 곡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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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In Wahrheit ist Archilochus, der leidenschaftlich entbrannte liebende und hassende Mensch nur eine Vision des Genius, der bereits nicht mehr Archilochus, sondern Weltgenius ist und der seinen Urschmerz in jenem Gleichnisse vom Menschen Archilochus symbolisch ausspricht

    강대경 :: 정열에 불타오르고 사랑하며 증오하는 인간인 아르킬로코스는 실제로 이미 더 이상 아르킬로코스가 아니고 세계 예술가이며 그리고 자기의 근원적 고통을 인간 아르킬로코스를 내세우는 비유 속에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예술가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이진우 :: 열정적으로 불타올라 사랑하고 증오하는 인간인 아르킬로코스는 사실 수호신의 환영에 불과한데, 이 수호신은 이미 아르킬로코스가 아니라 세계 수호신이며 자신의 근원적 고통을 인간 아르킬로코스에 관한 저 비유 속에서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 니체의 아티스트 형이상학에 대하여 과문한 탓에 역자들은 “Genius”(천재)를 “예술가”, “수호신”으로 잘못 옮겼다. 특히 “수호신”은 논의의 여지가 없는 오역이다. 이런 번역물을 통해서 니체의 아티스트 형이상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고싱가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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