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제3장

이를 파악하려면 아폴론 문화의 저 예술적인 건축물을 그 돌 하나하나까지 허물어, 그 건축물을 지탱하고 있는 토대까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제 여기에서, ‘그 건축물의 박공에 있는 장려한 올륌포스 신들의 형상’, 그리고 ‘그 건축물의 프리즈로 장식하고 있는, 멀리까지 빛을 발하는, 부조로 묘사된 그 신들의 행위’가 우선 눈에 뜨인다.[1] 거기에서 아폴론 역시 다른 신들과 나란히 있는 하나의 신으로서 일인자의 지위를 요구하지 않은 채 있다고 해서, 우리가 헛갈릴 필요는 없다. 아폴론에게서 육화된 충동이야말로 무릇 전체 올륌포스 세계를 낳았으며, 이 의미에서 아폴론을 그 세계의 아버지로 인정해야 한다. 저토록 빛나는 올륌포스 존재들의 공동체를 낳았던 엄청난 욕구는 무엇이었을까?

여타 종교를 심중에 품고서 저 올륌포스 신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서 윤리적인 수준을, 아니 성스러움을, 비육체적인 정신화를, 자비로 가득한 사랑의 시선을 찾고자 하는 자는, 그들에 대하여 기분이 상하고 실망한 나머지 곧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금욕이니 정신성이니 의무니 하는 것들을 상기시키는 것은 전혀 없다: 여기에서는 충천衝天하고 넘치는 현존만이 우리에게 말을 걸며, 그 현존에서는 선악을 불문하고 목전에 있는 모든 것이 신격화된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자는 삶의 환상적인 과잉에 참으로 당혹스러워하기 십상이니, ‘몸 속에 어떤 마법의 음료가 스며들었기에 이 고조된 인간들은 어디를 바라보든 그네들 실존의 헬레나가, “달콤한 관능 속에서 부유하는”[2] 이상理想의 상이 웃음으로 맞아주는 삶을 누렸을까’를 자문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걸음을 돌린 자를 향해서는 외쳐야 한다: 거기 멈추시라, 형언하기 어려운 명랑함이 있는 삶이 당신 앞에 펼쳐져 있으니, 먼저 그리스 민족의 지혜가 바로 그 삶에 관하여 무어라고 말하는가를 들으시라. 오래된 전설이 있다. 미다스 왕은 오랜 기간 디오뉘소스 종자인 지혜로운 실레노스를 숲에서 사냥하려고 하였으나 잡지 못했다. 마침내 왕이 그를 손아귀에 넣었을 때, 왕은 물었다, 가장 훌륭하며 가장 좋은 게 무엇이냐고. 그 신귀(神鬼, Dämon)는 요지부동 침묵했다; 그래도 왕이 강압을 하자 마침내 그는 껄걸 웃으며 이 말을 설파하였다: “처량한 하루살이여, 운의 자식이여, 고생의 자식이여, 듣지 않음이 너에게 제일 유익하거늘, 어찌 너는 나더러 말하라고 하는 건가? 최선의 것은 네가 얻을 수 없다: 태어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無가 가장 좋은 것이므로. 하지만 차선의 것은 네가 얻을 수 있다—당장 죽는 것이므로.”

이러한 민족의 지혜와 올륌포스 신들의 세계는 어떤 관계일까? 고문받는 순교자가 본 황홀하기 그지없는 환영과 그의 고통과의 관계와도 같다.

마찬가지로 이제 올륌포스의 마법의 산이 우리에게 열리고 그 뿌리들이 우리에게 선보인다. 그리스인은 현존의 공포스러움과 경악스러움을 알았고 느꼈다. 하여튼 살 수 있기 위하여, 그는 올륌포스 존재들의 빛나는 꿈의 탄생을 그 공포스러움과 경악스러움 앞에 내세웠다. 자연의 거인적인 힘들에 대한 저 엄청난 불신, 모든 인식 너머에서 무자비하게 군림하는 저 모이라Moira, 인간의 위대한 벗 프로메테우스의 저 독수리, 현명한 오이디푸스의 저 공포스러운 운명,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어머니를 살해하도록 강제하는 저 아트레우스 가문의 저주, 요컨대, 저 숲신의 철학 전체—이로 인하여 암담함에 빠진 에트루리아인들은 파멸에 이르른다—는 물론이고 그 신화적인 실례까지 통틀어,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올륌포스 신들의 저 예술가적인 중간세계를 통하여 부단히 새롭게 극복되었으며, 어떻게든 은폐가 되었으며, 시야에서 멀어졌다. 살 수 있기 위하여 그리스인들은, 더없이 심각한 절박함에서, 이 신들을 창조하였다: 그 과정을 우리는 이렇게 상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흡사 장미꽃이 가시덤불 속에서 피어나듯, 원천적으로 공포스러운 거인적인 신들의 질서에서 벗어나 기나긴 이행을 거쳐 올륌포스 신들의 기쁨의 질서가 전개되었다고. [인간]현존이 한 차원 높은 광휘에 휩싸인 채 그들의 신들에게서 내비치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예민하게 느끼고, 그토록 격하게 욕망하고, 그토록 전무후무하게 고통을 겪어냈던 민족이 달리 어떻게 현존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예술을 삶 속으로 불러들이는 충동이야말로, 살아남으라고 유도하는 현존의 보충이자 완성으로서, 올륌포스 세계까지 탄생시켰다. 그 세계에서 헬라스의 “의지”는 광명을 비추는[3] 하나의 거울 앞에 선 셈이었다. 그렇게 신들은 인간 삶을 손수 삶으로써 인간 삶을 정당화[4]하였다—유일하게 만족스러운 신정론神正論![5] 그러한 신들의 밝은 햇볕 아래에서 현존은 그 자체만으로도 추구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느껴졌으며, 호메로스적 인간들의 진정한 고뇌는 현존과의 이별, 무엇보다도 당장의 이별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 호메로스적 인간들에 관하여, 실레노스식 지혜를 뒤집어서, “그들로서는 최악은 당장 죽는 것이며, 차악은 무릇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이 탄식이 언제고 울릴 때면, 이는 또한 단명한 아킬레우스에 관한 탄식이기도 하며, 인간 세대의 잎새와도 같은 무상함,[6] 영웅시대의 몰락에 관한 탄식이기도 하다. 날품팔이로나마 살아남기를 바라는 일[7]은 제아무리 위대한 영웅이라해도 볼썽사납지 않다. 아폴론적인 단계에서, “의지”가 그토록 격렬하게 이 현존을 요구하고 호메로스적 인간은 이 현존과 그토록 일체라고 느끼니, 저 탄식조차도 현존의 찬가가 된다.

여기에서 이제, 후대 인간들이 그토록 애타게 바라보았던 조화, 그렇다, 인간과 자연의 일체—이에 대하여 실러는 “소박”[8]이라는 용어를 적용한다—은, 우리가 각 문화의 문전에서 인류의 낙원으로서 마주쳐야만 했던, 아주 단순한 상태, 자생적으로 생겨나 필수적으로 거치는 상태가 결코 아니다: 루소의 에밀을 예술가로 생각하고자 애썼으며, 자연의 심장으로부터 육성된 예술가 에밀을 호메로스에서 찾아냈다고 착각했던 한 시대만이 그러한 낙원이 있다고 믿을 수 있었을 따름이다. 예술에서 “소박한 것”과 마주치는 지점에서, 우리는 아폴론적인 예술의 지고한 영향을 인식해야 한다: 아폴론적인 예술은 언제나 우선 거인들의 제국을 전복하고 난폭한 그들을 처치해야 했으며, 강력한 망상의 거울상들과 욕망으로 가득한 허상들을 써서 공포스러운 세계관의 심층과 격심하기 짝이없는 고통의 바탕을 이겨내야만 했다. 소박한 것은, 가상의 아름다움에 온통 함몰됨은, 그러나 그 얼마나 희박하게 이루어지는가! 그러하니 호메로스가 그 얼마나 탁월한가를 이루 말할 길 없다. 단 한명의 꿈 예술가가 민족과 자연의 뭇 꿈의 바탕과 관계를 맺듯이, 호메로스는 단 한명으로서 저 아폴론적인 민족 문화와 관계를 맺고 있다: 호메로스식 “소박함”은 다름아닌 아폴론적인 허상의 완벽한 승리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 허상이란, 자연이 제 의도를 성취하기 위하여 그토록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진정한 목표는 한 폭의 망상의 영상으로 가려져 있다: 이 영상을 붙들려고 우리는 손을 뻗으며, 자연은 우리를 미혹하여 저 목표를 달성한다. “의지”는 천재와 예술세계의 광명Verkärung으로 제 자신을 그리스인들에게 관조시키고자 하였다; 장려하게 드러나려면, 다름아닌 그의 피조물들이 장려한 것으로서 감지되어야 했으며, 이 완성된 관조의 세계는 명령이나 질책으로 화하는 일 없이 한층 더 높다란 천구天球 속에서 재현되어야 했다. 이게 아름다움의 천구이며, 그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비추는 거울의 영상들, 올륌포스의 존재들을 보았다. 이 아름다움의 거울상을 들고서, 헬라스의 “의지”는 고통과 고통의 지혜를 상대하는 예술가적인 재능에 맞서 투쟁하였다: 그리고 그 승리의 기념비로서 호메로스가 우리 앞에 서 있다, 그 소박한 예술가가.

  1. 그리스 건축의 박공과 프리즈 부분을 확인해 보자. 그림은 건축물에서의 박공(pediments)과 프리즈(frieze) 부분의 도해이고, 사진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프리즈 부분의 촬영이다.
     

    박공과 프리즈 파르테논 신전의 프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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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괴테, 파우스트 1권 2603행:

    당신은 말이야, 이 음료가 몸에 퍼지면,
    곧 어느 여자나 헬레나로 보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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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verklären’을 ‘광명을 비추다’로 번역하였다. «비극의 탄생»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낱말은 신약성서에서 보고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변모變貌, 즉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얗게 됨”(마태 17,1-2)과 관련하여 쓰인다. 니체는 다음 4장에서 라파엘로의 그림 <그리스도의 변모>을 들어 “소박한 예술작품”을 예시하고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라틴어 ‘Transfiguratio’로서 ‘변모’의 뜻이지만, 이에 해당하는 독일어 번역어는 ‘Verklärung’으로서 그 의미는 ‘환히 비춤, 광명’이다. []
  4. 정당화라고 번역한 ‘Rechtfertigung’은 신학용어이다. 카톨릭에서는 ‘의인義認’, 개신교에서는 ‘칭의稱義’라는 용어로 번역한다. 그리스도교에 의하면, 인간은 죄가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대결했던 니체는 초기에 인간 현존의 정당화 문제를 고심하였으나, 이후에 현존 자체가 불의하지 않으므로 정당화의 필요성이 없다고 보았다. 현존은 현존 자체로 이미 정당한 것이다. []
  5. 신정론Theodizee은, ‘이 세계의 악에 대하여 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비난에 직면하여 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이다. 고대에는 스토아학파가, 근대에는 라이프니츠가 신정론에 대한 관심이 컸다. «아침놀»(1881) 1권 91, “신의 정직성”에서 언급하고 있는 니체의 신정론을 참고하라. []
  6. 호메로스, 일리아스 제21권 464행 이하:

    . . . 이들[인간들]은 잎새와도 같으니 한때는
    들녘의 결실을 머금고 샛빨갛게 타오르다가도
    이내 생기를 잃고 시들어버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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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11권 487행 이하:

    나의 죽음을 두고 위로하지는 마시오, 빛나는 오뒷세우스여,
    숨을 거둔 망자들을 전부 거느리고 왕노릇을 하느니
    차라리 농투성이 되어 땅뙈기도 없고 가산도 하잘 것 없는
    다른 사람에게 빌붙어서 품팔이라도 하고 싶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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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소박”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의 2장 각주 3을 참고하기 바란다. []

«비극의 탄생» 제3장”에 대한 1개의 댓글

  • 1.
    So rechtfertigen die Götter das Menschenleben, indem sie es selbst leben—die allein genügende Theodicee!

    강대경 역 :: 신들은 그들 스스로 인간적 삶을 살아감으로써 인간의 삶을 긍정하였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그리이스 신들의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다.

    이진우 역 :: 이렇게 신들은 스스로 인간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인간의 삶을 정당화하였다—이것만으로 충분한 변신론이다!

    => 강대경은 철학적인 기본 개념들에 취약한 편이다. 자신에게 이해(실제로는 곡해일 경우가 많다)가 된다 싶으면 기본용어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경향이 있다. 그에 비하면 이진우는 철학적인 기본개념을 잘 알고 있다. 이 사례뿐만 아니라, 2장에서도 강대경이 “예술적 환희”, “예술적 현상”으로 잘못 옮긴 것을 이진우는 “예술가적 환희”, “예술가적 현상”으로 제대로 옮겼다. 이런 점에서만큼은 이진우의 번역본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소수에 불과하다.

    이 대목에서 두 번역자는 뒷 문장을 잘못 옮겼다. “그렇게 신들은 인간 삶을 손수 삶으로써 인간 삶을 정당화하였다—유일하게 만족스러운 신정론神正論!”으로 옮겨야 한다.

    &nbsp;

    2.
    In den Griechen wollte der “Wille” sich selbst, in der Verklärung des Genius und der Kunstwelt, anschauen.

    강대경 역 :: 그리이스적 의지는 예술가와 예술세계를 찬미함으로써 그리이스인들 속에서 자신을 내보이려 했다.

    이진우 역 :: 그리스인들 속에서 “의지”는, 수호신과 예술 세계의 미화를 통해,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자 했다.

    => 이 문장에서는 “Verklärung”과 “Genius” 개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Verklärung”에 대해서는 각주3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이것을 “찬미”와 “미화”로 옮겼다는 사실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Genius”는 니체의 아티스트 형이상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인데, 이를 “예술가”, “수호신”으로 옮겼다는 것은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누누히 한 이야기를 잘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의지”는 천재와 예술세계의 광명으로 제 자신을 그리스인들에게 관조시키고자 하였다”로 옮겨야 한다.

    고싱가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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