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비극의 탄생» 이외의 니체의 텍스트를 읽어보면서 국내 번역본들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근간된 책세상 번역본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가 있긴 했지만, 나는 이제 그 기대를 접기로 했다. 살펴본 역본마다 기존의 오역이 개선되지 않았고, 특히 문체의 템포 면에서는 오히려 퇴보를 하고 말았다.
아마, 문체를 가지고 너무 문제 삼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니체의 초기작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후의 저작들을 비교해 본다면, 문장구조, 문장의 호흡, “문체의 템포”가 확연히 다르다. 그 템포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면 니체를 모르는 것이라고 봐도 된다.
니체의 사상은 니체의 문체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니체는, “문체를 개선하는 것 — 이것은 곧 사상을 개선하는 것을 뜻한다”고 보았다.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수긍하지 못하는 자를 설득할 길은 없다.”(KSA 2, 610) 더 나아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수긍하지 못하는 자는, 니체 번역의 자격이 없다.
뛰어난 번역은 문체의 템포를 함께 번역하는 것이다. 그 템포를 번역하지 못한다면 거의 “위작”에 가까운 번역이 나올 수도 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니체의 경고다. 니체의 경고를 따르자면, 책세상 번역본 대부분은 위작에 가깝다.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정동호 역본은 이제까지 독일어에서 직접 번역한 번역본들 중에서 가장 심하게 문체의 템포를 죽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해서 기존의 오역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도 아니다. 다만 몇 가지 개념들, 가령 “위버멘쉬”, “신체”, “힘에의 의지” 등의 올바른 역어(과연 올바른지도 의문이다)를 구사했다는 것이 이 역본을 추천하는 학계의 평인가 본데, 참으로 우습다.
언젠가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존 번역본들을 총평할 기회가 있겠지만, 기존 번역본들이 문체의 템포를 너무나 무시하고 있는 듯해서, 참고 삼아, 니체의 관련 텍스트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길 때 가장 열악한 것은 문체의 템포다: 문체는 종족의 성격, 좀더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종족의 “신진대사”의 평균 템포에 바탕하고 있다. 사물과 언어에 내재된 온갖 위험을 뛰어넘는, 뛰어넘도록 도와주는, 원본의 늠름하고 호쾌한 템포를 함께 번역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원본을 본의 아니게 지리멸렬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번역들, 거의 위작에 가까운 번역들이 정말 있다. 독일인은 독일어로는 프레스토presto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당연히 추론해야 하는 바, 자유롭고 자유정신다운 사상의 뉘앙스들, 그 유쾌하고 호탕한 수많은 뉘앙스들도 역시 불가능하다. 몸으로나 양식良識으로나, 그리하여 독일인은 부포buffo와 사튀로스가 생소하며, 그리하여 독일인은 아리스토파네스와 페트로니우스를 번역할 수 없다. 엄중하고, 묵직하게 흐르고, 엄숙∙둔감한 갖가지 문체, 따분하고 지루한 갖가지 종류의 문체가, 독일인들에게서 흘러넘칠 만큼 각양각색 발전하였다, — 사람들이여 나를 용서하시라, 괴테의 산문조차도, 그 산문이 속해 있던 “좋았던 옛 시절”의 거울상으로서, “독일적 취향”이 남아 있던 시기의 독일적 취향의 표현으로서, 뻣뻣함과 매끈함으로 혼합되어 있어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관습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in moribus et artibus) 로코코 취향이었다. 레싱은, 多를 이해하고 多에 능통한 그의 배우 천성 덕분에, 하나의 예외를 이룬다: 그가 공연히 베일의 번역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흔연히 디드로와 볼테르 가까이로, 더 나아가 로마의 희극작가들 속으로 도피했다: — 레싱은 템포에서도 자유정신성을 좋아했고, 독일로부터 도피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독일어로, 설령 레싱의 산문이라하더라도, 어찌 마키아벨리의 템포를 모방할 수 있으리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플로렌치아의 맑고도 마른 공기를 들이쉬고, 가장 심각한 문제를, 주체할 수 없는 알레그리시모allegrissimo로 쏟아냈다: 어쩌면 과감하게 대비시키겠다는 악의적인 아티스트 감정이 없지는 않았으리라 — 사상은 장구하고 무겁고 딱딱하고 위험한데, 갈로프galopp의 템포, 최고로 분방한 기분의 템포. 어느 누가 무모하게도 기어이 페트로니우스를 독일어로 번역하리오, 창안 면에서, 발상 면에서, 언어 면에서, 전대미문의 위대한 음악가, 프레스토의 대가였던 그를: — 페트로니우스처럼, 한 줄기 바람의 발, 만물을 내닫게 하여 만물을 건강하게 하는 한 줄기 바람의 스침과 숨결, 활연한 조롱을 품고 있는 자라면, 결국, 병들어버린 몹쓸 세계의, 또한 “고대 세계”의 각종 늪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 광명을 비추고 보완하는 그 정신,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스 세계 전체에 대하여 그 세계가 현존했다는 사실을 용서하게 된다, 그들이 ‘어찌하여 거기의 모든 것이 용서, 광명이 필요한가’를 심층 전반에서 파악했다면 말이다: — 그 아리스토파네스라고 할진대, 플라톤의 은폐와 스핑크스 본성에 대하여 나로 하여 몽상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는, 다행스럽게도 전승된 다음의 사소한 사실petit fait 이상의 것이 없을 듯하다: 사람들이 플라톤의 임종자리 베개 밑에서 발견한 것은 “성서”도, 이집트인의 책도, 피타고라스 책도, 플라톤 책도 아니었고, — 오히려 아리스토파네스 책이었다. 한 명의 플라톤조차도, 한 명의 아리스토파네스가 없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생을 — 그 스스로 ‘아니다’라고 말했던 그리스적 생을 —, 버텨낼 수 있었겠는가! —
— «선악 너머» II, 28(KSA 2, 46f)1
- 기존의 번역본들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이 텍스트에서도 예외없이 여러 군데 오역을 하고 있다. 이제 그 오역들을 일일이 지적하기도 지쳤다. 이 텍스트의 주석은 생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