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 Archives: 고싱가

개울 가득 붉은 물결이 흘러가더라

桃花雨後零落下 染得一溪流水紅

복숭아꽃이 비 온 뒤에 떨어지는데
계곡 흐르는 물이 붉게 물들었네.

도화꽃이 언덕 위에 붉게 피었는데, 비가 와서 싸-악 떨어졌다 이 말이야. 도화꽃이 싸-악 떨어져서 개울이 가득 붉은 물결이 흘러가더라. 개울 가득하게 흐르는 물에 이 복사꽃이 뻘겋게 물들어야만 해제더라 이 말이야!

— 원담스님의 무자년 동안거 해제법어 중에서

안거 해제 때마다 불교계 신문에 발표되는 여러 총림의 해제법어들을 두루 읽어보는 편인데, 내게는 언제나 원담스님의 해제법어가 바로 가까이에서 들렸다. 감동적이었다.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은 시인처럼 타고 나는 것이어서 깨달았다고 하여 모두가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아라한이 되어 저편으로 아예 건너가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완벽한 일상인이 되어 생을 마감할 수도 있는 법이고, 누군가는 보살이 되어 남을 향해 흘러넘쳐 빛을 내뿜을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은 보살 중에서도 시인처럼 타고나야 하고 당대의 교양을 습득하고 있어야 한다. 스승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스승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토록 자애롭고 품위 있고 산들바람 같은 것도 어쩌면 한 국가의 왕자로서 최고급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몽산법어»에서도, 깨달은 이후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불교·유교·도교의 온갖 서적들을 섭렵하며 온전히 역량을 기르라고 가르치고 있다.

상대방의 언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언어들이 집념으로 구축한 세계의 구조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언어들의 난해한 구조에 얽혀든 사람들의 속박의 메커니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역량을 기른다는 것은 이렇게 상대방의 정신적 난맥상, 상대방의 정신적 집념을, 높은 위치의 시선으로 온전히 파악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원담스님의 해제법어가 언제나 가까이 다가오길래 얼마 전 동안거 해제법어 이후에 원담스님의 법문집 «덕숭산법향»을 구입하였다. 해제법어가 하도 깨끗하게 다가오니, 과연 어떤 분일까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밤에 원담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제는 더 이상 이 시인의 시를 만나지 못하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春光到處無彼此 桃紅梨白薔薇紫

봄빛이 닿는 곳엔 저쪽 이쪽이 없어
복사꽃은 붉고 배꽃은 희고 장미는 붉어라

— «덕숭산법향»(518)

지난 해에 태고보우 스님의 유적지를 찾아 용문산을 가던 길에 나무 한 그루가 아름다워 차를 멈추고 계곡가의 나무에 다가갔다. 산돌배나무였다. 산들바람에 흰꽃이 눈부시게 흩날리던, 개울 가득 그 흰 꽃잎이 낭자하던, 그날. 흰 꽃잎이여, 오늘 하루 하늘 가득 낭자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