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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싱가 숲 &#187; 노시산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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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산들바람으로,폭풍으로,나비의너울거림으로</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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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 덩어리 환영과 겨울땔감 — 노시산방의 감나무 이야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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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5 Nov 2008 08:24:19 +0000</pubDate>
		<dc:creator>고싱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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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근원 김용준이 성북동으로 이사를 한 것은 1934년이었다. 당시 성북동의 형편이 어떠하였으며, 그가 이곳으로 이사온 까닭에 대해서는 그의 글 (1939년 무렵의 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 구천동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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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을 찾아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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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30 Jul 2008 05:58:02 +0000</pubDate>
		<dc:creator>고싱가</dc:creator>
				<category><![CDATA[문화유적답사]]></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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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심우장, 이태준 고택, 간송미술관, 최순우옛집 등은 성북동 일대를 답사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답사지들이다. 그러나 이재준가는 어느 교회의 부속건물로 쓰이고 있어 답사가 곤란하며 성낙원 역시 개인 소유여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 이재준가나 성낙원에서는 흠모할 만한 정신성을 발견할 수 없어 그곳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다지 아쉽지 않은데, 노시산방을 답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노시산방은 근원 김용준이 1934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성북동 집이다. 거의 모든 답사 안내글은 이제는 노시산방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나 역시 노시산방이 성북동이 개발되는 와중에 사라진 줄만 알았다. 그러다가 김병종의 &#171;화첩기행&#187;(효형출판 2005)을 읽는 중에 눈을 의심케 하는 대목을 발견하였다: "근원 선생님, 두고 떠나신 성북동 노시산방에는 가을이 한창입니다./ 저는 지금 다시 찾아와 그곳에 서 있습니다."(2권 184면) 아니, 노시산방이 . . . !

김병종의 글에 따르면, 방문 당시의 집 주인은 "자애로운 노년의 여인"이며 노시산방의 옛 내력을 알고 있는 듯 화초를 걷어내지 않고 고스란히 남겨두었다고 한다. 노시산방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감나무 역시 그대로 남아 김병종을 맞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노시산방의 주소를 밝히지 않고 그저 성북동이라고만 했다. 김병종은 서세옥의 제자이고 서세옥은 김용준의 제자이니, 김병종은 김용준의 고제高弟가 된다. 김병종이 김용준의 &#171;근원수필&#187;과 &#171;조선미술대요&#187;를 통해 "육친의 체취"를 느꼈다고 고백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니까, 노시산방을 자주 방문하여 그 위치를 알고 있었던 서세옥이 김병종에게 노시산방의 위치를 가르켜줬던 모양이다. 서세옥은 노시산방을 이렇게 회고한다:

	<blockquote>
	근원 선생은 성북동 노시산방이라는 조그만 한옥에 사셨습니다. 당시에는 성북동이 서울이 아니고 경기도 고양군이었어요. 성북동에서 삼선교까지 개울이 흘렀는데 아주 일품이었죠. 바닥이 전부 노들바위여서 그 물이 층층 폭포를 이루면서 삼선교로 흘러내렸어요. 그 개울물이 선생이 사시던 노시산방 문 앞에도 흘렀는데,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야 대문으로 들어가게 돼 있었어요. 삼선교에서 성북동으로 오르는 길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전나무가 서 있었고, 대낮에도 토끼가 왔다갔다했어요. 참 아름다웠죠.

	&#8212; &#171;근원전집 이후의 근원&#187; 12면
	</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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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붉게 타오르는 성곽 아래 연꽃이 피어나 — 심우장 배관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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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8 Jun 2008 08:01:42 +0000</pubDate>
		<dc:creator>고싱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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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strong>붉게 타오르는 성곽 아래</strong>
&#160;

사대문 안을 감싸는 도성의 북쪽 성곽은 북악산 줄기를 따라 흐른다. 우리나라의 산은 아름다우므로, 능선을 타고 흐르는 성곽은 공주산성의 예와 같이 올라섰다간 내려오고 내려오다간 올라서는 자연을 닮는다. 성북동은 성의 북쪽에 있다 하여 지어진 유서 깊은 이름이며, 현재에도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 현재와 같이 차폐물이 많지 않았던 때에는 성북동 어디에서나 성이 보였다. 위창 오세창은 간송미술관의 보화각 정초명에서 "우뚝 솟아 화려하니, [도성의] 북쪽 성곽을 굽어 본다"고 하였다. 이 북쪽 성곽은 성북동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숙정문에서 혜화문에 이르까지 경계를 그으며 흐른다. 아울러 성북동의 서쪽에서 북쪽, 동쪽에 이르기까지는 구진봉의 주능선이 마을을 크게 품으면서 부채처럼 펼쳐져 있다. 그리하여 성북동은 성곽이 있는 깊은 산중, 깊은 골짜기가 된다. 지금은 도시의 모습이 되고 말았지만,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심산유곡"이니 "산협"이니 했다. 선사와 선비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산과 골짜기.

1933년 성북천 개울 가까이에 터를 잡고 월북할 때까지 살았던 이태준은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성북동 서남쪽 능선을 따라 흐르는 산성을 즐겨 보았다.

<blockquote>
山마라에는 山봉오리 생긴대로 울멍줄멍 城壁이 솟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여 있다. 솟은 城壁은 아침이 첫화살을 쏘는 과녁으로 城北洞의 光明은 이 山上의 옛 城壁으로부터 퍼져나려오는것이다. 한참 쳐다 보노라면 城壁에 드리운 소나무 그림자도, 城돌 하나하나 새이도 빤-히 드러난다. [...]

멀-리 떨어지는 夕陽은 城머리에 다어선 불처럼 붉다. 구불구불 山등셍이로 달려올라간 城郭은 머리마다 타는것이, 어렸을때 자다말고 나와 본 山火의 輪廓처럼 무시무시 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꺼지는 夕陽일뿐, 아무것도 아니다. 고요히 바라보면 지나가는건 그저 바람이요 구름뿐이다. 있긴 있으면서 아무것도 없는것, 그런것은 생각하면 이런 옛城만도 아닐것이다.

&#8212; 이태준, <城>
</blockquote>

이태준이 바라보던 곳, 석양이 성 머리에 닿아 산불처럼 타오르던 곳, 그곳에는 붉은 화롯불 속의 연꽃처럼 심우장이 있었다. 만해 한용운도 이태준과 같은 시기인 1933년에 성북동 송림에 "띄끌세상을 떠나면/ 모든것을 잊는다 하기에/ 산을 깍아 집을짓고/ 돌을 뚜러 새암을 팟다"(한용운, <山居>). 1936년에 심우장을 내방했던 어느 학인은 돌다리를 지나고 나무다리를 건너 심우장 오솔길로 오르면서 "한양의 옛 성을 등지고 돌아앉은 [...] 심산유곡"이라 하였다. 그는 심우장에서 한용운을 면담하고 나서 사위를 살피고는 성북동 심산유곡의 한가로움을 이렇게 기록했다:

<blockquote>
하루 종일 앉아야 어린아이 소리, 사람 자취 하나 들려오지 않는 이곳이건마는 해가 서편 산허리에 기울어졌을 때에는 건너편 골짜기 청룡암에서 들려오는 소린지, 산중턱 미륵암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뎅뎅뎅 하는 저녁 종소리가 점점 가느다랗게 들려올 뿐이다.

&#8212; 春秋學人, <尋牛莊에 參禪하는 韓龍雲씨를 찾아>
</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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