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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싱가 숲 &#187; 인문·종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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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산들바람으로,폭풍으로,나비의너울거림으로</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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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언어에 대하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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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4 Jul 2009 15:53:44 +0000</pubDate>
		<dc:creator>고싱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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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독일관념론]]></category>
		<category><![CDATA[라이프니츠-볼프]]></category>
		<category><![CDATA[마이스터 에크하르트]]></category>
		<category><![CDATA[번역]]></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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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서양철학사 관련 책을 읽은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칸트를 필두로 한 독일관념론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에서 정립된 철학용어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런 철학사의 흐름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으나, 일본이 근대화되던 시기에 독일관념론의 용어들을 번역하면서 한자로 조어한 용어들이 현재 우리나라 언어로 고스란히 계승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철학용어는 결코 무시할 게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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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 고귀한 사람이 먼 곳으로 떠났다” – 게르하르트 베어의 &#171;마이스터 에크하르트&#187;를 읽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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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06 Jul 2009 15:11:18 +0000</pubDate>
		<dc:creator>고싱가</dc:creator>
				<category><![CDATA[인문·종교]]></category>
		<category><![CDATA[게르하르트 베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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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마이스터 에크하르트]]></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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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이십대 시절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설교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루가복음 10장 38절 한 구절에 대한 설교였는데, 에크하르트는 그 설교에서 라틴어 성서구절을 독일어로 직접 번역하여 소개한다. 라틴어 성서 원문과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번역문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예수께서 한 성읍으로 올라가시니 마르타라는 이름의 한 여인이 그분을 집에 영접했다(Intravit Jesus in quoddam castellum et mulier quaedam,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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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권력과 시문이 하나였던 시대의 책읽기 — 강명관의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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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30 May 2009 19:26:07 +0000</pubDate>
		<dc:creator>고싱가</dc:creator>
				<category><![CDATA[인문·종교]]></category>
		<category><![CDATA[강명관]]></category>
		<category><![CDATA[조선]]></category>
		<category><![CDATA[책]]></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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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개인적 취향을 말하자면, 낭만주의보다는 계몽주의를 좋아하는 편이고 계몽주의보다는 냉소주의를 좋아하는 편이다. 냉소주의를 멀리하고 낭만주의에 친근했던 학창시절과는 정반대가 된 것은, 이제는 인간 이성이 구축한 진지하고 치밀한 인식체계가 하나의 거대한 농담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불가분 권력과 결탁된 교조주의·도덕주의를 접하노라면 그 농담의 거대함 때문에 저절로 웃음이 난다. 웃음으로 중력의 영, 무거운 정신을 죽이자고 말했던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예삿말로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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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박한 의견에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별로 없다 &#8212; &#171;불교가 좋다&#187;를 읽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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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2 Sep 2008 06:50:16 +0000</pubDate>
		<dc:creator>고싱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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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불교]]></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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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불교에 접근하는 통로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며, 불교를 바라보는 시선도 각기 다를 것이다. 이제 나는 수행자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펼쳐낸 언어의 세계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므로, 수행자가 아닌 이들이 불교에 접근하는 상이한 방식, 불교를 바라보는 상이한 시선이 궁금하기도 하여 별미 삼아 이 책을 집어들었다.
특별히 융 심리학을 전공한 학자와 젊은 시절에 티베트 불교를 수행하고 라는 기발한 제목의 책까지 쓴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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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여유당(與猶堂) 당호의 해석 문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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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30 Nov -0001 00:00:0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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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인문·종교]]></category>
		<category><![CDATA[도덕경]]></category>
		<category><![CDATA[여유당]]></category>
		<category><![CDATA[정약용]]></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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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다산 생가의 여유당(與猶堂) 당호가 도덕경 15장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임은 다산의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밝혀놓고 있다. 그래서 해당하는 도덕경 구절을 참조하면 당호의 의미가 쉽게 도출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지만, 정작 도덕경 구절 자체가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다름아닌 여유당의 ‘與’와 ‘猶’ 두 글자의 해석이 어려운 것이다. 글자의 기본 뜻으로만 본다면 ‘더불다’와 ‘오히려’를 나타내지만, 도덕경의 문맥에서도 이러한 뜻은 전혀 아니거니와 여유당 당호에서도 역시 아니다. 그래서 이를 최대한 문맥상 어그러지지 않는 방향으로 번역하고 넘어가는데, 가령 박석무·정해렴이 편역한 «다산문학선집»(현대실학사 1996)에서 “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猶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하거라”(101)로 옮기고는 “與는 의심이 많은 동물 이름이며 猶는 겁이 많은 동물의 일종이다”(102)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박무영이 옮긴 «뜬세상의 아름다움»(태학사 2002)에서는 “망설이기를[與]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겁내기를[猶]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87)로 옮기고 있다. 박무영의 번역은 “與”와 “冬涉川”, “猶”와 “畏四隣”를 각기 평행하는 의미로 보아 “與”와 “猶”를 자전에도 없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사실 박석무 번역은 역사적으로 전고를 갖고 있으며, 박무영 번역은 의미가 중복되기는 하지만 가장 조심스러운 해석이다. 더구나 두 번역자가 여유당 당호와 관련이 있는 도덕경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관련 주해서들을 참조하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실제로, “與兮若冬涉川猶兮若畏四隣”와 관련하여 도덕경 해석서들을 들춰본 결과 이 두 방향에서 어긋난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도덕경 해석서들과 다산산문 번역자들이 “與”와 “猶”, 혹은 “與猶”에 관하여 제대로 해석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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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나무 속에, 파도 속에, 구름 속에, 모든 사물들 속에 — C.G. 융의 자서전을 읽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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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1 Jun 2007 07:14:31 +0000</pubDate>
		<dc:creator>고싱가</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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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영지주의]]></category>
		<category><![CDATA[융]]></category>
		<category><![CDATA[자서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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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17)로 시작되는 «회상, 꿈 그리고 사상»(이부영 옮김; 집문당 1990)은, 당대의 혹독한 편견과 냉대를 무릅쓰고 극도로 고독한 자리에서 무의식의 세계를 대면하면서 인간의 내면, 자기 자신을 탐구했던 정신의학자 C.G. 융의 자전적 저술이다. 이 책은 융의 전집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부분은 융이 집필하고 나머지는 융이 말한 것을 조력자 아니엘라 야훼가 정리한 일종의 자서전이다. 여기에서 융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내적인 체험들을 중시하고서 그의 생애를 회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꿈과 환상과 명상, 그리고 체험이 주 내용을 구성한다. 나보다 앞선 세대의 번역이어서 그런지 번역어가 낯선 면이 있지만 요즘 소장학자들의 상투적인 번역어(독한사전 수준의 한글)에 많이 지쳐 있는 나는 오히려 무척 반가웠다. 다만 번역어에 대응하는 독일어를 일일이 확인하기가 어렵고(가령, 심혼, 영혼, 귀령, 영, 정신, 마음, 자아, 나 등등) 아주 가끔씩 비문과 엉뚱한 번역어가 튀어나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정말 잘 읽히는 문장이다. 나의 이 글은 이 책에 대한 소개서라기보다는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된 융의 감동적인 생애에 대한 약간의 안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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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천 육백 년 편견의 역사를 뒤집다 — 스티븐 횔러의 «이것이 영지주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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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30 Nov -0001 00:00:0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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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인문·종교]]></category>
		<category><![CDATA[그노시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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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나그함마디]]></category>
		<category><![CDATA[영지주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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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blockquote>
그대들은 사탄의 통로다. &#8230; 그대들은 사탄이 감히 공격하지 못한 남자를 꾀었던 여자다. &#8230; 그대들 각자가 이브라는 사실은 아는가? 그대들의 성性 위에 내린 하느님의 선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필연적으로 죄 또한 유효하다.
</blockquote>

상식이 있는 이들이라면 위의 인용문이 얼마나 편견에 가득 차 있고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간파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믿기 어렵겠지만, 초기기독교의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가 여성들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과연 이런 혐오스러운 글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혹시 성서 문자주의와 교조주의 때문은 아닐까? 그는 "불합리하므로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는 유명한 문구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물론 그가 이 문구를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신학적 태도는 이 문구로 요약될 수 있다. 신의 아들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은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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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외로운 봉우리로 해가 저무네 — 최준호의 &lt;원교창암유묵&gt; 해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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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8 Mar 2007 15:03:01 +0000</pubDate>
		<dc:creator>고싱가</dc:creator>
				<category><![CDATA[문화예술]]></category>
		<category><![CDATA[인문·종교]]></category>
		<category><![CDATA[고미술]]></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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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원교창암유묵]]></category>
		<category><![CDATA[이광사]]></category>
		<category><![CDATA[이삼만]]></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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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table class="alignleft">
<tr><td width="204">
<img id="image338" src="http://www.gosinga.net/wp-content/uploads/2007/03/choneunsa.gif" alt="choneunsa.gif" />
</td></tr>
<tr><td width="204">
원교 이광사의 천은사 일주문 편액
</td></tr>
</table>
내 고향의 천은사가 항상 맑고 청신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가는비가 흩뿌릴 때 천은사 일주문을 자주 들었던가 보다. 그러나 어쩌면 일주문 편액 탓인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찰의 일주문 편액이 가람의 위세를 과시하듯 힘찬 필세의 글씨라면, 천은사 일주문 편액은 풀잎을 뒹구는 물방울처럼 작고 맑게 흐르는 필세의 글씨였다. 일주문 편액의 분위기가 곧 천은사 가람의 분위기를 대표한다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듯하다. 원교 이광사의 '유수체(流水體)'라 하던가. 그런가 보다 했던 것이 불과 몇년 전인데, 작년부터 글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미술에 일가견이 있는 것도 아니요, 다년간 서화를 보아온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글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우리나라 탁본첩이나 서첩을 빌려와  일견하면서 수많은 서예가들 중에서 마음에 들어오는 서예가들을 꼽아보았다. 김생, 탄연, 영업, .... 그들 모두가 명필 중의 명필로 꼽히는 분들이었다. 나는 서첩들을 보기 이전에 서예관련 글이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역시 예술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따로이 설명이 필요없고 곧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인가? 능호관 이인상도 그렇게 만났다. 그에 관한 견문도 없었고 관련 글도 읽은 바 없었지만, 전시된 단 하나의 작품을 통해서 나는 단번에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만큼 나의 고미술 지식이 형편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내가 그들에 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의 작품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대단히 기쁘다. 내 감각에 대한 확신이 내가 소유한 지식보다 월등히 소중하기 때문이다.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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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어우야담» 번역논쟁을 지켜보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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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9 Feb 2007 16:33:59 +0000</pubDate>
		<dc:creator>고싱가</dc:creator>
				<category><![CDATA[인문·종교]]></category>
		<category><![CDATA[번역]]></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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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오역]]></category>
		<category><![CDATA[이상수]]></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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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먼저 한겨레신문 지면과 웹상에서 벌어졌던 &#171;어우야담&#187; 번역논쟁 기사를 연결한다:

<ul>
<li><a h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81050.html">[서평] 야사와 괴담으로 읽는 조선시대 /이상수</a></li>
<li><a href="http://www.hani.co.kr/arti/opinion/readercolumn/183809.html">[반론] 번역과 소통의 맥락 /신익철</a></li>
<li><a href="http://www.hani.co.kr/arti/opinion/readercolumn/185034.html">[답변] 반론던진 신익철교수에 답한다 /이상수</a></li>
<li><a h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85716.html">[재반론] 이상수 기자의 지적에 대한 답변 /신익철</a></li>
<li><a h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88892.html">옛글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8212; 신익철 교수의 재반론에 대한 답신 /이상수</a></li>
</ul>

이 논쟁의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개인적인 소감을 덧붙히고자 한다. 이 논쟁은 이상수 기자가 최근에 신익철 교수 외 3인이 번역한 유몽인의 &#171;어우야담&#187;(돌베개, 2006년 11월 출간)을 소개한 서평기사에서 시작되었다. 이상수 기자는 서평에서 &#171;어우야담&#187;을 흥미롭게 소개한 뒤 번역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짤막한 평을 덧붙였다:

<blockquote>
옮긴이들은 서로 다른 판본 27종을 견주어 <어우야담>의 원문에 표점과 교감 내용을 덧붙여 별책으로 묶었고, 본문 속에 나오는 동아시아 인물들에 대한 꼬마 사전도 덧붙였다. 독자들은 비로소 우리 고전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 번역을 만난 셈이다. 그러나 번역문 가운데 수장(水漿), 상식(上食), 임모(臨摹) 등 이미 죽은 옛말들을 풀이말도 없이 그대로 드러낸 건 아쉽다. 민간에 발을 깊게 담근 유몽인의 민중지향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또 중국을 ‘상국(上國)’이라 쓴다거나 ‘우리나라 말’을 ‘방언(方言)’이라고 옛말 그대로 옮긴 건, 연구자가 현대 한국인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8212; [서평] 야사와 괴담으로 읽는 조선시대 /이상수
</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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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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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작고 맑은 나라의 상실∙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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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30 Nov -0001 00:00:0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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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인문·종교]]></category>
		<category><![CDATA[압록강은 흐른다]]></category>
		<category><![CDATA[이미륵]]></category>
		<category><![CDATA[전혜린]]></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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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strong>고요한 마을</strong>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들 중 가장 귀한 것 하나는 소리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현대의 도시생활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다른 소리와 섞이지 않은 채 들려오는 경우는 없다. 도시에서는 모든 소리가 소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니 "댓잎에 눈이 내리는 소리"와 같은 표현도 불가능하고 그런 표현에 대한 감응도 불가능하다. 옛 시대의 고요는 천지에 가득 찬 고요였겠으나 현 시대의 고요는 그저 심리적인 고요,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이것은 감각의 타락이며 인간성의 타락이다.

이미륵이 송림(松林) 마을로 내려가 지냈던 생활을 서술하는 대목을 읽노라면 '소리'에 대한 예민한 감각들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171;압록강은 흐른다&#187;의 장점 중 하나는 이미륵이 자신의 관념과 의도에 따라 소설을 재구성하기보다는 다만 옛 시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감각들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소리'에 대한 특별한 서술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세대의 소리 감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blockquote>
다시 조용해지고, 온 마을이 자고 있는 것 같았다. (100)

집 안도, 온 마을도 죽은 듯이 고요했다. 다만 해안을 스쳐가고 스쳐오는 밤 물결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100)

이젠 바닷가에는 깊은 정적이 흘러넘쳤다. 물결 소리, 파도 소리가 멀리 밀려갔기 때문이다. (102)

눈이 쌓이면 쌓일수록, 밤이 조용해지면 조용할수록, 낭독은 더욱더 감동적으로 고조되어갔다. (104)

이제 나는 아무 소음도 없는 고요한 이 마을에 다시 돌아왔다. (112)
</blockquote>

거의 모든 독자들은 위와 같은 구절들에 주목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륵이 의도적으로 이런 구절들을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은 맥락 속에 워낙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옛 세대의 소리 감각이 이미륵을 키웠기 때문이다. 이런 소리 감각은 비단 음악적 재능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완성시킨다. 그것은 인간을 위대한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위대한 영역? 그렇다. 천지가 고요하면, 그 고요에 잦아드는 인간이 위대해진다. 천지가 고요하면, 그 고요한 가운데 들리는 소리가 위대해진다. 이 고요와 이 소리 속에서 피어나는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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