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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 밥과 한 벌의 누더기로 천고의 세월을 날다 — 세심동 개심사


생의 반 고비를 건너며 뒤돌아보니 문득 한 인간의 생은 애절한 꽃과 다름없고, 그 꽃잎을 어루만지는 한 줄기 바람은 고맙고 또 아프다. 길을 나서서 만난 ‘그곳’들은 한 줄기 바람과도 같아, 거기에 맑고 고요하게 응함은 곧 내가 배우고 내가 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글자 하나에도 한 뜻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채이는 돌부리에도 자각의 기미가 있지는 않을까, 스치는 선과 빛깔에 온몸을 맡겨볼까 하며 이리저리 용을 쓰는 나그네로서는, ‘그곳’들이 싱싱하고도 두렵게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다가온다.

그러다가 ‘그곳’에 어린 옛사람의 흔적이 희끗 보이거나 희미한 숨소리라도 들릴라치면, 빈 뜰을 거닐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는 순간처럼 오감五感을 집중하게 된다. 그때, 오감, 다시 말해 오욕五欲을 총동원하여 ‘그곳’의 사람과 사물을 응대하려는 나그네의 뜻은 사뭇 대견하고, 그제서야 비로소 살아 있다는 긍지, 건강하다는 긍지가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기 시작한다.

일주문을 대신하는 표지석 ‘세심동 개심사’는 언어의 본질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허름하다. ‘언어는 허름하다’는 말없는 가르침에 의하여 나그네의 마음에는 벌써부터 파문이 인다

그러나, 세심동 개심사洗心洞開心寺. 마음을 씻는 골, 마음을 여는 절. 개심사의 표지석은 허름하고 볼품없건만, 유독 나그네의 오욕과 나그네의 분별만큼은 가로막는다. 자기 자신만이 자신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하던가. 저 허름한 언어는 영혼의 새벽을 가리키고 있고, 나그네는 언어 너머로 우뚝 서버린 홍송이 너무 높아 그 그늘 발치에서 하염없이 서성인다.

부처는 참慙과 괴愧, 즉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함을 통하여 청정과 고요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참괴와 긍지는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 없다. 참괴를 통하여 청정에 이를 수 있다면, 마음을 씻는 일은 세간에서 찌든 때를 씻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건강하다는 긍지, 살아 있다는 긍지, 마음 안팎에서 일어나는 긍지, 그러므로 존재하려는 긍지마저도 버림이 아니겠는가.

불법佛法을 자랑하지 말라 하였으므로 출세간에서의 살아 있다는 긍지 역시 더러울 것인데, 세간에서의 살아 있다는 긍지만큼 더러운 것이 달리 어디 있겠는가. 나그네는 “살아 있다는 긍지를 버림이 곧 세심이자 청정”이라는 가르침에 충격을 받는다.

거기에다, 이곳 개심사를 유력遊歷하였던 경허선사와 그 제자와의 문답 한 토막:

경허가 수도암에서 지내던 어느 날, 여러 납자들과 차를 마시다가 <선요>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납자들에게 물었다.
“<선요>에 이런 대목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

차를 마시고 앉아 있던 한암이 대답했다.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瓦墻·기와담장)이 앞에 있습니다.”

경허는 이튿날 법상에 올라가 대중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초과했느니라.”

만물의 근원적인 존재 양식을 간파한 수행자에게 경허선사는 “개심을 초과했다”고 하였다. 이 문답을 접하고 나니, 개심사를 향하여 가는 세인이 오감에 집중하고 분별을 일군다는 것이 도리어 개심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임이 확연하다. 그렇다면 세심동 개심사는 무엇하러 오르는가?

아니 다시 묻는다, 어찌하여 이 허름한 언어에 이토록 마음에 파문이 이는가? 무엇을 따라 마음이 일어나고 무엇을 따라 마음이 고요해지는가? 바람 불어 물결 일듯, 한 줄기 의심이 인다.

마음이 무엇이기에, 그 한 줄기 바람결에 어느새 살아 있다는 긍지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천연히 놓인 돌계단을 딛고 오르는 순간마다 의심은 병고처럼 깊어지는가. 하나의 발걸음마다 하나의 뜻을 거두니 커다란 의심 덩어리는 더욱 커진다. 대상이 따로 없는 커다란 분노를 가지고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청정한 솔잎의 향을 맡는다.

단풍의 환희도 없고 은산銀山의 정결도 없는 이 남루한 계절에 통과해야 하는 개심사 관문. 그 어귀에서 솔잎을 스치고 세심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가늘고, 바람에 말려 전해오는 솔향은 바짝 말랐다. 나그네의 오감은 말라버린다. 돌계단 위로 떨어져 물빠진 황금빛으로 뒹굴고 있는 솔잎처럼 나그네의 오욕은 나그네의 발길에 밟힐 뿐이다.

모름지기 의심과 분노 없이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법, 개심사 어귀를 오르는 나그네는 빈틈없이 긴장되어 있다.

 

개심사 어귀를 오르는 길, 긍지를 버리는 길, 의심과 분노의 길, 그 길을 오르다 보면 아연 숲이 끊긴다. 몸을 감출 길 없어 부끄러운 찰나 탁 트인 평지에 네모꼴의 연못, 이름하여 경지鏡池가 눈에 든다.

문을 열면 담장이 있고 문을 닫으면 담장이 없는 이치를 가르치기라도 하듯, 연못은 벚꽃을 비추다가 그 꽃이 떨어지면 그치고, 백일홍을 비추다가 그 꽃이 지면 그치고, 단풍을 비추다 낙엽이 지면 그치고, 은산을 비추다 눈이 녹으면 그치기를 되풀이한 지 어언 수백년이 되었으리라. 주변의 풍경을 사시사철 그대로 끌어안았다가 때가 되면 그대로 버리는 연못은 과연 그 존재 양식으로 개심사 경내와 경외를 구분하고 있다.

홍송의 숲이 끊어지며 급부상하는 개심사의 경지鏡地는 가을날의 적멸을 되비추며 한 철의 삶을 수습하고 있다. 연못을 들여다보는 나그네여, 그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지금은 온갖 이채異彩를 내버리고 잿빛 진경과 푸른 하늘을 저 멀리서부터 받아들이고 있는 초겨울. 가을날의 장엄을 증언하는 단풍잎은 얼마 전까지도 제 얼굴을 이 거울에다 비추었으련만, 지금은 운명에 순명하여 거울에 몸을 던져 버린 참이다. 개심사 경지는 한 철의 삶을 수습하고 있고, 나그네의 마음은 언뜻 생사를 잊어버린 듯 소슬하고 청정하다.

부처는 제자들이 재가자의 집을 방문할 때 연못을 들여다볼 때처럼 몸과 마음을 긴장하라 하였으니, 개심사 경지鏡池는 속인이 산사를 들어설 때 비추어보는 연못일 뿐만 아니라, 수행납자가 세간으로 나설 때 비추어보는 연못이기도 하다. 하나의 장소, 상이한 행로. 산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계절에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마주하기도 하나, 시선의 깊이는 다르다.

하품 하생의 삶으로 엮어진 나그네, 진흙으로 빚어진 나그네, 연못을 들여다본다. 연못에 잠긴 얼굴이여, 그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연못 속에 잠긴 연꽃이여, 그대 어디로 솟으려는가. 벚꽃도 백일홍도 단풍도 저 산 너머로 떠나보낸 수면 위를 거뭇한 그림자로 유영하는 그대여, 왜 여기 눈물처럼 흐르고 있는가.

연못으로부터 시선을 거두면 사라지는 얼굴처럼, 망상을 거두고 뜻을 거두면 흩어지고 마는 우리의 언어, 우리의 세계. 나그네의 완강하였던 습성은 자꾸만 무산한다. 그래 무산하여라, 개심사 경내에 머무는 순간만이라도 무산하여라.

눈을 들어 경지의 전경을 살피니 사라지는 얼굴, 사라지는 세계. 성난 물결에 몸을 맡겨 사라져버렸다는, 연못 위에 걸쳐 있었다는 외나무다리를 어느덧 마음으로 그려본다. 그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모든 이들은 전신으로 위험을 느꼈으리라.

좌우로 치우침이 없이 협착하고 위험한 길에 온몸을 맡기고 아슬아슬 물 위를 통과하고 나면 오른편으로는 나무들이 우뚝 서서 시야를 훅 차단한다. 하여 왼편으로 시선을 올리면 말없는 학처럼 날개를 펼쳐 높은 허공을 날고 있는 누각의 처마.

얼마 전까지도 실상으로 존재하였던 외나무다리가 어느새 전설이 되어버린 시절에, 나그네는 범종루를 치어다보며 오래도록 마음을 빼앗긴다. “종은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린다. 거울은 되놈이 오면 되놈을 비추고 왜놈이 오면 왜놈을 비춘다.”(진각국사)

 

경지(鏡地)에 몸과 마음을 비추어보고 나서 든 개심사 경내는 범종루의 날개로 이곳을 기웃하는 모든 이들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말없는 학처럼 높은 허공 위에서 한껏 펼친 채로 정지해 버린 날개, 초겨울의 차갑고 시린 하늘

거울에 몸과 마음을 비추어보고 통과한 개심사 경내는 범종루의 날개로 이곳을 기웃하는 모든 이들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높은 허공에 정지한 날개, 초겨울의 차갑고 시린 하늘. 겨울날의 얼음장을 깨치며 깨치며 날아가는 새들처럼, 나그네가 참괴의 마음으로 올려다보는 세계는 단호하고 자유롭다. 저 새들처럼 날아갈 수 있을까. 지상의 낮은 자리에 처한 연못과 지상의 높은 자리에 처한 누각은 한결같이 마음 시리도록 청정하다.

그 청정함에 옷깃을 새삼 여밀 수밖에 없기에, 누구든 개심사 대웅보전 영역을 직격으로 쳐들어가지 못한다. 모퉁이에 있는 낮고 조그마한 해탈문으로 뉘엿뉘엿 모퉁이진입隅角進入을 하면 단아한 청색 단청의 대웅보전과 그 뜨락이 시선에 부상하는 것이 마치 꽃봉오리가 터질 때 향기를 툭 토하는 듯하다. 세간의 마음이 이리도 아뜩 단아해질 수 있단 말인가. 뜨락을 거니는 일행들의 걸음 역시 안행을 하듯 조용조용하고 섬세하다.

심검당과 설선당 앞에서는 때아닌 목련이 사철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천진함을 토하고 있다. 그러한 천진함으로 심검당을 세웠을 것이고 범종루를 세웠을 것이고 개심사의 가람을 배치하였을 것이고 홍송의 돌계단을 놓았을 것이기에, 그 천진함이 애처롭거나 마음 아프지 않다. 오히려 천진함이 나그네의 마음 가득히 고요하고 청정한 장을 열어주고 있다.

모두가 극찬하는 심검당의 장인은 수백년이 흐른 뒤 이곳을 사랑할 한 나그네의 발길을 미리 내다보았으려나. 그렇지 않고서야 전당 곳곳에 서려 있는 티끌없는 영혼을 나그네가 어찌 느낄 수 있겠는가.

그의 마음과 하나될 수 있다면 내게 주어진 한 생을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하나의 생이 끝나는 것도 한 호흡간이고 하나의 생을 뛰어넘는 것도 한 호흡간이니, 생사를 뛰어넘는 것도 한 호흡간이리.

망상과 집착을 일합에 두 동강 내기 위하여 칼을 찾는 수행자들이 기거하는 심검尋劍의 당. 기어이 칼을 찾아 망상과 집착을 동강 내어 생사를 뛰어넘을 수행자의 행리를 미리 알고 그토록 천진하게 지어올린 것일까. 그러하리라. 설선당과 심검당의 목수처럼 천진함을 기뻐하였던 진각국사는 말한다:

이리 칠하고 저리 바르기 천만번 한들
어찌 천진의 본래 모습만 하랴

東塗西抹任千般
爭以天眞本來樣

— <천진선사를 위하여>에서
 

만일 천진에 맡겨 두지 않으면
학의 다리를 끊어 오리 발에 붙이는 격

若不任天眞
續鳧而截鶴

— <상서 최우에게 답함>에서
 

파란 눈동자로 푸른 산을 마주할 때
한 티끌도 그 사이에 용납 안 된다
맑음이 절로 뼈 속까지 사무치거니
무엇하러 새삼스레 ‘열반’ 찾으랴

碧眼對靑山
塵不容其間
自然淸到骨
何更覓泥洹

— <선당에서>에서(1)

심검당은 그 천진함으로 대웅보전 뜨락 안에 청정과 고요를 은은히 채우고 있다. “한 바루 밥과 한 벌의 누더기로 천만의 산을 날으는 새”처럼, 심검당은 천고의 세월을 넘어 넘어 나아가리라

개심사 대웅보전 뜨락에서는 왼쪽을 보아도 오른쪽을 보아도 눈과 대상 사이에 티끌 하나 끼어들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의 언어란 언어는 모두 먼지를 일으키려는 부질없는 바람에 불과하다. 그러하니 여기에 또 무슨 해석을 가하여 그 허사의 바람에 먼지를 던지랴.

심검당과 눈동자 사이에, 혹은 대웅보전과 눈동자 사이에 빈 공간이란 없다. 죽음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듯, 이러한 천진함과 단아함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으리라. “한 ‘바루’ 밥과 한 벌의 누더기로 천만의 산을 날으는 새”(진각국사)처럼, 천고의 세월을 뛰어넘어 날아오는 천진함이여, 그리고 단아함이여!

이 청정과 고요를 투철히 볼 수 있다면 한 사람에게 주어진 생을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역사적으로 진각국사는 개심사와 아무런 연관이 없으나 그 천진함으로 인하여 누구보다도 개심사에 가까이 있으니, 심검당은 천기를 누설하며 서산의 마애불처럼 개심사의 뜨락에 서 있는 셈이다.

많은 길을 돌아 돌아 마침내 개심사 경내에 든 나그네는, 정녕 은산철벽을 날아넘는 마애불의 미소와 심검당의 천진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런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느니라

— «돈황본 육조단경»에서

한 그릇 밥과 한 벌의 누더기로 천고의 세월을 뚫어버린 각자覺者의 법어는 그렇게 나그네에게로 왔다.
[2003년 글]

  1. 김달진 편역, «韓國禪詩»에서 인용함 []

이 글은 2005년 12월 17일에 작성되어 문화유적답사,불교배우기(으)로 분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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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 밥과 한 벌의 누더기로 천고의 세월을 날다 — 세심동 개심사'에 대한 댓글 3


  1. 심검당; 하면 장자에 나오는 얘기가 생각나요. 소 사천 마리를 잡으면서도 여물 먹는 얼굴로 숨 놓게 했다는 어떤 칼잽이 …. 망상과 번뇌를 이렇게 끊을 수 있는 경지가 불법일까요… 해탈문을 ‘뉘엿뉘엿’ 진입한다는 말 참 좋군요.

    강물

    2005년 12월 19일

  2. 그 칼잽이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긴장됩니다. 칼잽이와 심검당을 연결시킨 혜안도 놀랍습니다.

    Gosinga

    2005년 12월 19일

  3.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Gary Koo 丘宗勳 , Gary Koo 丘宗勳 . Gary Koo 丘宗勳  said: 파란 눈동자로 푸른 산을 마주할 때 한 티끌도 그 사이에 용납 안 된다 맑음이 절로 뼈 속까지 사무치거니 무엇하러 새삼스레 ‘열반’ 찾으랴 碧眼對靑山 塵不容其間 自然淸到骨 何更覓泥洹 — <선당에서>에서(1) http://bit.ly/bcSdv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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