紅梅

▲ Gosinga 作, 화엄사 홍매
우리나라의 옛 그림들을 들추다 보면 “탐매도”라는 제명의 그림을 제법 만날 수 있다. 산천의 초목 모두가 아직 겨울 때깔을 벗지 못하고 있을 때, 언덕에서, 구릉에서, 산속에서 홀로 피어나는 매화를 보기 위하여 선비들이 길을 나서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 그림들이다.
옛사람들은 왜 매화를 찾아나섰을까? 매화를 찾아 길을 떠나길 좋아했던 그들의 성정을 상상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거니와, 자신이 직접 봄날의 기운이 움틀 무렵 남도 지방으로 여행을 가는 것은 더욱 좋다. 남도로 향하는 동안 꽃잎 하나 구경할 수도 없으나, 지리산을 넘자마자 확연히 눈에 띄는 매화는, 확실히 봄이 왔다는 확신을 준다. 그 꽃을 보고 상경하고 나면, 서울의 날씨가 제아무리 쌀쌀해도 봄에 대한 실감나는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꽃샘추위가 결코 춥지 않다. 이것은 착각이 아니라 사실이다.
매화를 제대로 접하지 못했을 적에는 그저 매화가 희겠거니 막연히 생각뿐이었는데, 사실은 매화의 꽃잎은 하얀 색에서 진홍색까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녹색 빛을 띄는 청매도 있다.
그 중에서도 홍매는 빛깔의 농도가 제각각 다르다. 거의 흰색에 가까운 분홍에서부터 진한 분홍에 이르기까지 농도가 차이가 심하다. 그런데, 분홍색이 아닌 진정으로 붉은 색이 있다. 뭐랄까, 자주빛을 띄고 있는 붉은 색이랄까. 굉장히 드물긴 하지만 눈을 의심케 하는 빛깔의 홍매인 것이다. 화엄사 각황전 오른편에 서 있는 늙은 홍매가 그렇다.
산에 언덕에 피어나는 꽃도 운치가 있지만, 절집의 꽃 역시 격이 다른 운치가 있다. 산하에 피어난 꽃보다 절집에 안겨 있는 꽃이 가슴을 더욱 두근거리게 한다. 비록 수행처라고는 하지만 절집 역시 사람이 사는 곳. 사람의 거처에 피어나는 꽃이 그립고 또 고마운 탓일까.
그러므로, 봄철만큼은 절집의 수행자들을 부러워해야 마땅하다. 더구나 우리네 절집들은 산 속에 묻혀 있지 않은가.
지리산 골짜기에 기세 당당하게 자리잡은 화엄사. 사실 화엄사 경내를 거닐다 보면 금강문을 통과한 이후부터 가람의 배치가 뭔가 약간 분주하고 거대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는 효대와 절집 뒤로 십여 분 올라가면 닿을 수 있는 구층암의 공간이 있어 그 인상을 상쇄시킨다.
그러나, 봄날이면, 화엄사의 경내에는 홍매의 꽃이 핀다. 가슴을 훅 트이게끔 곧게 곧게 뻗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버드나무처럼 치렁치렁 흐르는 가지에 붉은 꽃잎들이 파르르르 뿌려져 있다. 이제 막 꽃이 피어나는 참이다. 그 웅장하던 각황전도 하마 홍매 가지와 그 꽃의 리듬에 빠져 난파될 것만 같다.
우연히 아침에 집어든 시집에서
제가 했던 생각과 비슷한 시를 보아서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여기 올려 봅니다.*^^*
꽃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 사이에 피어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것과 내것 아님의 경게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aspirin
2005년 08월 30일
이 구절이 마음에 드는군요.
Gosinga
2005년 08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