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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물과 황차


북한산 자락에 살면서 받는 수혜 중에서 샘물을 마실 수 있다는 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나무들 곁에 숲 곁에 살고 싶어 이사를 왔는데, 산골물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 놀랐고, 또 샘물을 길어 마실 수 있다는 점에 놀랐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얼마나 감격했던가. 그 감격은 지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정릉계곡 쪽에는 샘물이 열 군데 정도 이르는데 각 샘마다 물맛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비가 오고 안 오고에 따라서 수량이 많이 달라지거나, 수원에 가까이 있거나, 물이 덜 차가운 것은 물맛이 떨어지는 편에 속한다. 그리고 비가 온 뒤 물맛이 많이 달라지는 것도 하품에 속한다.

이제까지 내가 맛본 샘물 중에서는 형제봉 지능선의 석간수가 최고였다. 어느 비오는 날, 형제봉 산등성이를 따라 산행하면서 만나는 샘마다 물맛을 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샘물이었는데, 비오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단연 맛이 깨끗하고 차가웠다. 표현이 좀 역설적이긴 한데, 좋은 물은 무슨 특별한 맛이 있는 게 아니라 오직 물맛만 있다. 다른 잡스런 맛이 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좋은 물은 잡스런 맛이 적다 보니까 떫은 맛도 없고 뭔가 씹히는 맛도 없다. 그래서 어떤 때는 물맛이 달게 느껴지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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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마시는 황차다. 차잎을 발효시키지 않으면 녹차를 얻을 수 있고 완전히 발효시키면 홍차를 얻을 수 있고 절반을 발효시키면 황차를 얻을 수 있다. 속이 좋지 않아 녹차 마시는 것이 여의치 않다면 황차를 권한다.

형제봉의 석간수를 만나고 난 뒤로는 그것을 찻물로 쓰고 있다. 서울에 살면서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곤란을 겪는 것은 아마도 찻물을 구하는 것일 게다. 차맛은 물맛에 결정적으로 좌우되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는 게 내 일상에서 말 그대로 다반사(茶飯事)가 된 것도 바로 찻물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아침 저녁으로 밥을 먹은 뒤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거실 툇마루에 찻상을 차려놓고 차를 마신다. 물맛과 차맛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커피를 마시지 않게 되었다.

차는 황차를 즐겨 마신다. 어쩌면 맛과 빛깔이 그리 정결하고 고운지 모르겠다. 차잎을 발효시키지 않으면 녹차를 얻을 수 있고 완전히 발효시키면 홍차를 얻을 수 있고 절반을 발효시키면 황차를 얻을 수 있다. 처음에는 녹차를 마셨으나 속에 부담이 되는 듯해서 마음껏 즐기지 못했는데, 황차를 마시니 속에 부담되는 느낌이 전혀 없다. 아무리 마셔도 머리가 맑고 속이 편하다.

화엄사 구층암에서 제다하는 황차를 얻어다 마시고 있는데, 완벽한 야생차다. 그 어떤 비료나 거름도 주지 않고 오직 지리산의 햇빛과 공기와 물과 바람과 흙 속에서 자라난 차나무에서 얻은 것이니, 이보다 좋은 차가 없다. 이 차를 맛본 뒤로는 다른 차의 맛이 확연히 식별이 된다. 그만저만한 차들만 마시면 차의 맛이 식별이 되지 않는 법이니, 모름지기 최고의 차를 마셔보아야 한다는 게 빈말이 아닌 듯하다.

결국 차 마시는 게 생활화된 것은 좋은 차와 좋은 물을 얻게 된 이후였다. 그리고 좋은 차와 좋은 물을 마실 수 있는 조건의 사람, 그것들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는 생리적 조건을 갖추게 된 이후였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정신 자체도 신진대사의 일종이기 때문에, 물과 차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그 맛에 투명하게 반응할 수 있는 정신이 아니면 안된다. 술을 좋아하고 커피를 좋아하는 신진대사로 차맛에 제대로 반응할 수는 없는 것이니, 차 역시도 억지로 권할 바는 아니다.


이 글은 2009년 09월 19일에 작성되어 생활잡감(으)로 분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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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물과 황차'에 대한 댓글 2


  1. 끽다를 형과 같이 하기엔 저는 아직,이 아니라 한참 멀었고 -,-
    멀리 있지만, 추석 지나고 스산한 바람 불기 전에 북한산자락에 있다는 만포면옥의 냉면이나 형이랑 형수님이랑 윤서엄마, 아버지내외랑 같이 먹으면서 오랫만에 뵐 수 있음 좋겠네요 ^^

    요즘 공부를 좀 열심히 하고 있고, 조만간 또 뵈러 갈께요.

    armani

    2009년 09월 23일

  2. 와, 제대로 공부하나 보네. 수행하시는 분들은 이번 생애 안 태어난 셈 치고 신명을 바쳐 공부하라고 가르치지. 한번 그렇게 공부해 보게. 좋은 날 보자구. 윤서네랑 연락해서 날짜 잡으면 우리가 거기에 맞출게.

    고싱가

    2009년 0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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