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결한 탐미성은 어디로 갔는가? — 신권화폐의 배경 도안을 보고
옛 사람들은 매화를 과연 무슨 마음으로 대했던 것일까? 왜 봄이 오는 길목이면 매화를 찾아 길을 나섰던 것일까? 겨울날 허름한 비산비야의 풍경 속에 홀로 피는 매화는 천하에 봄이 왔음을 알리는 한 그루 나무여서, 어느 산야에서 이를 발견하는 순간 소생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자칫 스산하게 끝나버릴 것같던 고절한 삶에 새로움과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 맛을 보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위로하기 위해, 옛 사람들은 탐매의 여정을 떠났을 것이다. 꽃잎도 작고 맑고 끼끗한지라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은 새로운 생명과 접촉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조희룡의 <매화서옥도>처럼 분분히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아름답게 장식하고 넘어가기에는 매화가 너무 아깝다. 그래서, 어느 지방의 매화꽃 축제처럼 떼지어 무리로 피는 매화는 옛 사람들의 매화가 아니다.
한 마디로 고결한 정신을 대표하는 초상으로 대할 만한 게 매화라고 보는 게 내 입장인데, 그런 면에서 매화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꽃이 아니라 가지에 달려 있다고 본다. 신권화폐 오만 원 권에 배경그림으로 들어가게 된 어몽룡의 <월매도>도 역시 매화나무 가지가 매력이요, 꽃은 이제 갓 피어나기 시작하는 참이어서 꽃망울이 잘 식별되지 않을 정도이고 꽃잎은 있는 듯 없는 듯 그려져 있다. 가운데로 쭉 뻗어오른 가지는 매우 가냘퍼서 강직함보다는 여린 심성을 드러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한 느낌을 준다.

어몽룡의 <월매도>. 탐미성에 고결한 조형을 덧입혔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상 가지 끝에 이웃한 보름달은 천 강에 비친 달처럼 신비로움을 선사하기보다는 탐미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는 탐미성에 고결한 조형을 덧입힌 것이다. 아마도 어몽룡은 다분히 여성적인 심성을 지닌 인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결한 탐미성이라는 언어로 볼 때, 어몽룡의 월매도는 가지의 가냘픔과 쭉 뻗어오른 기세, 그리고 먹빛의 연한 농도가 생명이다. 꽃망울은 마치 고목의 껍질 부스러기처럼 처리하고 꽃잎은 최대한 담묵淡墨으로 담아, 있는 듯 없는 듯 그려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그의 탐미성은 천함을 면치 못하고 싸구려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은 탐미성과 고결함이 결합되었던 극히 섬세한 정신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제 신권화폐의 배경 도안을 보자. 나뭇가지들은 둔탁할 정도로 두껍고, 쭉 뻗지 못하고 비슬비슬 올라간 가지는 중간에 잘렸으며, 먹빛은 진하고 너절하며, 선은 섬세하지 못하고 거칠기 짝이 없으며, 꽃잎은 천하고 지저분하다. 흰 매화꽃을 붉은 매화꽃으로 바꿔 그리기로 작정한 것인가? 긴장을 부여하는 가지의 미세한 기울기는 왜 사라졌는가? 이 도안에는 탐미성도 없고 고결함도 없고 섬세함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다. 원화에 대한 존경이 하나도 없다. 단언하건대, 이 디자인은 최선을 다하여 월매도를 모독한 것이다.

신권화폐 오만 원 권의 도안. 이 도안은 원화를 모독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어몽룡의 월매도를 가로로 배치했다는 사실을 문제삼고 있나 본데, 내가 보기에는 월매도의 모독에 비하면 그것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원화를 이토록 함부로 다룬 경우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이것이 한 나라의 문화역량이란 말인가. 한겨레신문의 기사에 의하면, 강우방이 “화가, 미술사학자, 디자인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들 사이에서 만장일치로 합의를 본 것”이라고 했다는데, 정녕 그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어느 한 개인의 판단은 그렇다쳐도, 자문위원들 모두가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하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근본적으로 모르는 뭔가가 있단 말인가?
나같은 예술애호가가 보기에도 너무나 명백한 이런 모독과 훼손을 두고 어느 누구 하나 지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라리 두려움에 가깝다. 도대체 그 많은 감식안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과연 누가 스스로의 안목을 믿고 이 신권화폐의 도안을 본격적으로 문제삼을 것인지 추이를 지켜보고 싶다. 이것은 한 나라의 안목과 정신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회화사를 전공한 강관식 한성대 교수도 조선 중기 선비 화가의 정절을 드러낸 매화와 대나무 그림의 품격에 배치되는 디자인이라고 비판했다. 강 교수는 “박물관에 <월매도>를 눕혀서 전시한 것과 똑같다”면서 “위쪽을 향해 수직 상승하는 매화 가지의 드높고 간결한 기운이 월매도의 핵심인데, 지폐의 배치 구도를 보면 <월매도>의 매화는 마치 가시 철조망처럼 보인다”고 밝혔다.
— 3월 16일자 한겨레신문 기사 중에서
위 기사에서 강관식은 가로로 배치된 것을 문제 삼고 “지폐의 배치 구도를 보면 <월매도>의 매화는 마치 가시 철조망처럼 보인다”고 고백했는데, 사실은 가로세로 배치 구도 때문에 가시 철조망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도안의 매화나무 자체가 가시 철조망처럼 그려진 것이다. 이 도안을 세로축으로 배치한들 가시 철조망처럼 안 보일 리가 없다.
남도로 내려가 매화를 찾고 싶은 봄날에 바람을 타고온 것은 황사보다도 달갑지 않은 일, 한 시대의 정신적 문화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것도 전문가들에 의한 모독.
kabbala의 느낌…
‘신권화폐 오만 원 권의 도안. 이 도안은 원화를 모독한 것이다.’ — 고싱가숲…
kabbala's me2DAY
2009년 03월 17일
정말 그렇습니다. 마침 박선생이 주말에 탐매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매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요. 동양화과 학생들하고 선암사로 화엄사 구층암으로 의재미술관으로…. 광주박물관 탐매특별전 도록까지 얻어왔더군요. 몇몇이 피기 시작할 때가 매화는 전성기라고. 진정한(?) 매화 보러 가고 싶네요….
강물
2009년 03월 17일
정말 이런 도안을 통과시킨 것인지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마 자문위원들 중 고미술 관계자는 한두 명에 불과했을 테고, 그 한두 명이 간과해서 벌어진 실수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옛 사람들의 정신세계라는 것이 화폐도안 전문가나 디자인 전공자라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한 나라의 화폐인데 저런 도안을 통과시켜 놓고 무슨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성이 완전히 배제된 도안을 채택할 생각이면, 차라리 월매도를 아예 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싱가
2009년 03월 18일
저 도안을 만장일치로 합의한 화가, 미술사학자, 디자인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을 저작권법 위반으로 신고합니다.
이정일
2009년 03월 19일
저작권은 시효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저작권법 위반은 아니겠습니다만, 심정같아서는 저작물 모독죄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고싱가
2009년 03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