檀園의 墨竹


bamboo.jpg

<新竹含露>, 紙本水墨, 23×27.4㎝, 간송미술관 소장

최완수 선생의 해제를 옮긴다.

단원은 화원화가이면서도 항상 자신이 사대부라고 자부하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래서 사대부들이 그리는 문기(文氣) 높은 사군자를 가끔 그려내었는데 그때마다 상당히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곤 하였다. 문사로서의 고고(孤高)한 자부심과 생활 자세가 이런 소재를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는 데다가 타고난 그림 재주에 당대 최고의 화원화가로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연마한 기량이 혼연일치되어 높은 수준의 세련된 그림을 이루어 내었기 때문이다.

이 <신죽함로>는 그런 문인화풍류의 그림 중에 대표적인 것이다. 죽간(竹竿; 대나무 둥치)을 왼쪽으로 대담하게 쳐올리면서 화면을 대각선으로 양분하는 통쾌한 화면구성법이나, 죽지(竹枝; 대나무 가지)를 좌우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운필법은 아무나 구사할 수 있는 기법이 아니다.

문사연(文士然)하는 자세로 살면서 문예군주인 정조에게 최고의 대접을 받을만큼 탁월한 솜씨를 자랑하던 단원이 아니고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경지이다. 보고 있노라면 바람이 지나며 이슬 떨어뜨리는 소리가 우수수 귓전을 두드리는 듯하다.

— <간송문화> 제69호(한국민족미술연구소, 2005) 146-147면
* 최완수 선생은 이 그림을 <新竹含露>라 칭하고 있는데, 보통은 <묵죽도>로 통용되기도 한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해설의) 유인물에서도 이 그림을 <墨竹>이라 칭하고 있다.

단원의 묵죽을 대문에 걸어놓고 한 해를 보내고 싶다.


이 글은 2007년 10월 24일에 작성되어 문화예술(으)로 분류되었습니다.

RSS로 이 글의 댓글을 구독하실 수 있으며 TrackBack으로 댓글을 쓰실 수도 있습니다.

태그: , ,



'檀園의 墨竹'에 대한 댓글 2


  1. 실제의 대는 저리 휘지는 않을텐데요… 두 번째 마디… 삶의 유연성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의식의 밖에 자리하는 존재의 불완전성,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회의하고 방황하면서 그러나 모자란 것들을 품고 살아내야 하는… 겨울을 창날 같은 푸름으로 견디는 대나무의 자세 속에 깃든 너그러움의 미학이라 할까… 그런 저런 생각을 한참 해봤습니다.

    강물

    2007년 11월 01일

  2. 저 역시 김홍도의 그림에서 너그러움을 느낍니다. 단호함이나 절개나 계율과는 사뭇 거리가 먼, 그저 맑고 한가로운, 음악적 선율같은 느낌. 우리나라에서 김홍도를 빼놓고 신선神仙을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고싱가

    2007년 11월 02일

댓글남기기